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 중구여행] 아이 못 낳는 부인이 치성을 드리던 곳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 건들바위역사공원(건들바우,삿갓바위).

SMALL

*건들바위역사공원,건들바우,삿갓바위.

지정 :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1982.6.29)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26길 69-12(대봉동) : 대봉동 731-7번지 일원

전화 : 053-661-2853

시설면적 : 2,452m²(743.0)

조성년도 : 2012.1.20.

관리기관 : 대구광역시 중구청

 

 

1. 건들바위는 바위 이름이면서 봉산동의 자연부락입니다.


2. 건들바위역사공원은 1994년 조경공사를 통해 분수, 계류, 푹포등을 새로이 설치하여 물이 흐르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답니다.


3. 건들바위건들바우또는 삿갓바위라고도 한답니다.


4. 건들바위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 면적은 962m²이며, 바위 옆의 절벽과 더불어 대구분지의 지반 구조를 잘 드러내준답니다.

옛날에는 건들바위 앞으로 대구천이 흘렀고 암벽의 균열과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암벽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옛 대구천은 수차례 도시개발로 물길은 사라지고 현재 복개된 상태로 남게 되었으며, 1994년 조경공사를 통해 분수, 계류등을 새로이 설치하여 물이 흐르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답니다.

             

5. 건들바위는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선바위(하식애)로 약 1억만년전 중생대 백악기 때, 호수로 운반되어 온 자갈. 모래.실트. 점토 등의 물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암입니다.

옛날에는 건들바위 앞으로 대구천이 흘렀고, 건들바위는 대구천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것이랍니다.

이후 암벽의 균열과 더불어 대구천에 의한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인해 암벽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의 모습을 보입니다.

건들바위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서 있는 모습이 불안하게보여 인근 주민들은 건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 점쟁이와 무당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리곤 했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았답니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천은 건들바위 앞으로 흘렀으나, 이후 지속적인 개발로 인해 물길은 사라지고 현재와 같이 복개된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건들바위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바위 앞으로 픙부하고도 맑은 물이 흘려 수려한 풍광을 보이는 명소였다고 합니다.

1994년 조경공사를 통해 건들바위 일대에 분수. 계류. 폭포 등을 새로이 설치하고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고 몇 차례의 개선공사를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6. 대구하천의 역사가 만들어낸 조각품 건들바위는 암벽의 균열과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암석으로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대구층) 특징을 잘 보여주는 바위입니다.

옛날에는 이 건들바위 앞으로 신천 상류에서 시작되어 대구를 관통하는 중심 하천인 대구천이 흘렀답니다.

그 물길에 의해 현재의 암벽 지층이 침식되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들바위 또한 암벽의 균열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흐르는 물의 작용에 의해서 암벽의 기슭에서 떨어져 나와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 돤답니다.

건들바위란 이름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확실 하지는 않으나, 건들바위의 큰 물체위에 작은 바위가 얺혀 있는데 건드리면 건들건들 한다고 건들바위라 이름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입니다.

최근 까지만 해도 이곳에 점쟁이와 무당들이 몰려와 지성을 드리곤 했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았답니다.

조선후기 대구의 중심부로 지나는 물길(대구천)을 신천으로 돌리기 전에는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낙시꾼들이 낙시를 하며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였다고 합니다.

1994년 조성공사를 통해 건들바위 앞으로 분수. 계류. 폭포 등을 새로이 설치하고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고 몇차례의 개선공사를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7. 대구층은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지층이며 경상층군의 하부로부터 7번째 지층에해당 된답니다.

이 지층은 적색, 황갈색 또는 암회색을 띠는 이암, 셰일, 사암, 등으로 구성 되었으며, 적색을 띠는 이암과 셰일이 많다는 점이 특징 입니다.

드물게 회색 석회암의 박층(얇은층)을 협재하기도 한답니다.

물결자국 건렬등의 퇴적 구조는 많이 발견 되지만 하천이나 호수 에서 퇴적 되었기 때문에 화석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구층이 도시개발로 인해 거의 사라져 그 특색을 찾기 어려우나 이곳에 그 일부가 남아 있어 보존 한답니다.

              

8. 대구천은 200년 전만 하더라도 건들바위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흘렀는데, 이 물길은 과거 대구의 중심 하천인 대구천입니다.

이 물길은 대구 도심 반월당을 거쳐 달성토성 앞 현재의 복개된 달서천으로 합류되는 물길과 삼덕동과 칠성시장 쪽을 거쳐 신천으로 합류되는 지류로 나뉘어 흘렀으나, 홍수 때마다 그 피해가 생겨 조선후기 대구판관 이서가 물줄기를 신천으러 돌렸습니다.

그 이후 물길은 건천 형채로 남아 있다가 1930년대 도시 구획정리때 대부분의 하천 흔적이 사라기게 되었으며, 건들바위 주변과 하류부의 암벽에서 옛 물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습니다.

     

9. 건들바위는1982.6.29.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있으며 면적은 962m²입니다.

  

10. 이곳은 조선초 사가 서거정선생이 노래한 대구10경중 제2경 입암조어의 자리입니다.

입암에 고기낚시.

이슬비 자욱이 가을을 적시는데 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잔챙이 고기야 적잖게 잡았지만 금자라 낚지 못해 자리 뜨지 못하겠네.

 

11. 건들바위 측면 모습입니다.


12. 건들바위역 부근에는 아담한 분수대도 설치되어 있는데요.

분수는 간혈적으로 작동 됩니다.


13. 분수대 주변 수로에는 작은 수초가 심어져 있습니다.

 

14. 주변에는 대구 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 열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15. 앞에 보이는 대구층은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지층이며 경상층군의 하부로부터 7번째 지층에해당 되는 지층 이랍니다.

이곳에는 계류등이 설치되어서 야경도 매우 아름답다고 하네요.


16. 나무데크로 만든 쉼터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17. 수로에는 수련도 심어져 있는 데 지금 꽃은 볼 수 없습니다.


18. 수로 주변에는 자주색 부처꽃이 반겨 줍니다.


19. 한국원산지 노란색 원추리꽃도 피어 있습니다.


20. 1994년 조성공사를 통해 건들바위 앞으로 폭포도 새로이 설치하고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고 몇차례의 개선공사를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21. 이곳은 건들바위, 대구층, 대구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22. 대구중구 골목투어 4코스 삼덕봉산문화길 마지막 종점 입니다.

 

23. 건들바위역사공원에는 파워싸이클,트우스트 와  터닝암.사이드스윙 2개의 운동시설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24. 건들바위역사공원 전경입니다.



*건들바위역사공원,건들바우,삿갓바위.

지정 :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1982.6.29)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26길 69-12(대봉동) : 대봉동 731-7번지 일원

전화 : 053-661-2853

시설면적 : 2,452m²(743.0)

조성년도 : 2012.1.20.

관리기관 : 대구광역시 중구청

건들바위는 바위 이름이면서 봉산동의 자연부락입니다.

 건들바위건들바우또는 삿갓바위라고도 한다. 이는 중구 봉산동 251번지에 있는 무당들이 자주 찾는 큰 바위이다. 예전에는 신천이 용두산에서 수도산 동쪽을 거쳐 건들바위에서 물굽이를 만들고 다시 연구산, 적십자병원 앞, 신명학교 밑, 달성공원, 달서천으로 흘렀다. 신천은 조선 정조 1(1776)에 대구판관 이서(李敍)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그 이전에는 배나무샘(梨泉)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미나리꽝을 만들어 미나리를 생산하기도 했다. 건들바위는 무당과 점쟁이로 성행했고 아이 못 낳는 부인이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대봉동 731-7번지에 있는 큰 바위다. 예전에는 신천이 용두산에서 수도산 동쪽을 거쳐 건들바위에서 물굽이를 만들고 다시 연구산, 적십자병원 앞, 신명학교 밑, 달성공원, 달서천으로 향했다 한다. 신천은 조선 정조 1(1776)에 대구판관 이서(李敍)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그 이전에는 배나무샘(梨泉)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미나리꽝을 만들어 미나리를 생산하기도 했다. 건들바위는 무당과 점쟁이로 성행했고 아이 못 낳는 부인이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건들바위는 그 소재지가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인데 봉산시장에서 수도산으로 뚫린 신작로 중간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도로를 곧게 내려고 했으나 이 건들바위 때문에 도로가 좌측으로 굽었다고 한다.

건들바위는 어느 때부터 생긴 이름인지는 오랫동안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표지판에도 그 유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갓을 쓴 노인 같다고 하여 입암(笠巖) 혹은 삿갓바위라고도 불러 왔다고 한다.

지금의 신천 도랑이 원래는 이 곳 수도산을 끼고 제일여상 쪽으로 하여 반월당을 지나 달서천으로 흘렀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바위 앞에는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낚시를 하며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로 알려져 왔었다. 건들바위 앞에 놓인 표지판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대구 십경(十景) 중의 하나로써 서거정(徐居正 14201488)선생의 입암조어(笠巖釣魚)의 시제(詩題)가 바로 이곳을 두고 읊었던 것이다. 한편 근세에 이르기까지 기이하게 생긴 이 바위에 점장이와 무당들이 몰려와 지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한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에도 초사흘, 초이레가 되면 촛불을 켜고 비는 부인들이 많아, 이 날만 되면 촛불을 켤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제보자의 얘기로는 실제로 건들바위에 빌어 아기를 낳았다는 사람들 몇 명 만나 보았다고 한다. 또한 동화사 갓바위도 아기를 가지게 하는 것은 용하다는 사실과 이 건들바위를 관련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무속적인 신앙이 이처럼 시내 한가운데서도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금 건들바위는 많이 마멸된 듯하고 또 뒷면에는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그 위에는 고가가 한 채 위치하고 있었지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건들바위 중간에 솟아 오른 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였다.

 대구 중구 대봉동 731-7번지에 길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건들바위라 부르는데, 바위모앙이 마치 삿갓 쓴 늙은이 같다 해서 삿갓바위(笠巖, 입암)이라 부르고 이 바위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지금의 신천은 대구 시가지 동북부를 흐르지만 원래는 용두산에서 수도산 동쪽을 스쳐 건들바위 그리고, 연구산, 적십자 병인 앞, 신명학교, 달성공원(達成公園) , 달서천으로 흘렀으나 1776년 조선왕조 정조1년에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이서(?)란 사람이 1778년 사재를 털어 축제 공사를 완성시킴으로써 새로 생긴 내를 "새내(신천)" 라 부르고 예로부터 흐르던 곳을 "구내"라 불렀다 하며 신천이 생기기 전에는 약 30년 전까지 수도산 동쪽에서 건들바위 일대까지 배나무샘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미나리꽝을 만들어 대구 시민에게 미나리를 제공하였다. 현재는 주택지가 되어있다.

(출처 : 대구시청)

  

*입암에서의 낚시  (笠巖釣魚)

 이슬비 자욱이 가을을 적시는데          (烟雨空?澤國秋)
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垂綸獨坐思悠悠)                     
잔챙이 고기야 적잖게 잡았지만          (纖鱗餌下知多少)
금자라 낚지 못해 자리 뜨지 못하겠네    (不釣金驚鉤不休)




*웃자퀴즈 494 : 경찰서가 가장 많이 불타는 나라는? 정답:불란서.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매주 월요일 정답 공개 합니다 ㅋㅋㅋㅋ

 

*보시고 아래모양에 공감 버튼을 ~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