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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대구시 블로그 기자

대구시 북구여행 -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는 칠성동의 유래 칠성바위 & 쌍용그룹의 출발점 삼공유지 발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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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성동의 유래가 된 고인돌 칠성바위를 아시나요 -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7개로 구성된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여 칠성바위라고 하며, 지역민들이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처로 이용되었답니다.

 

 

1. 대구광역시 태평로 시민회관 앞 잔디밭에 있는 칠성바위는 지석묘로 이것은 옛 공회당서 남쪽 소나무 숲 사이에 있던 것이나 1973년 대구시가 광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지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2. 대구역내 지하철역 4번출구로 나오면 넓은 광장에 칠성바위가 있습니다.

위 사진 촤측광장이 바로 칠성바위입니다.

 

3. 칠설바위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조 19년에서 21년까지 3년간 경상도 감사로 이태영이란 사람이 재직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북문밖(대구읍성이 있을 때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는데, 북문은 지금 북성로 경북인쇄소 부관에 있었다)에 떨어져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난 이 감사는 비록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 이상해 별이 떨어진 북문밖을 나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커다란 바위가 북두칠성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 감사는 이것이 필시 좋은 징조일 것이라 생각하길 7개의 바위에다 석공을 불러 자기 일곱아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겼다.

즉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라(義拏)의 순위가 그것입니다.

 

4. 칠성바위는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2가 302에 있습니다.

이곳의 바위들은 고인돌의 개석으로서 원래 대구역의 서남쪽에 유존하였던 것인데, 조선 정조때 경상감사 이태영은 꿈에 북두칠성이 북문밖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일곱 아들의 이름을 이 바위돌에 새겨 복을 빌었으며 이에 지역민들도 칠성바위로 부르면서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처로 이용하였고 칠성동의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답니다.

그후 칠성바위는 1973년 시민회관의 신축을 계기로 발굴조사 되었으나, 별다른 유구나 유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시민회관 남쪽의 화단에 옮겨 보존 되었는데, 1998년에 칠성동으로의 이전요구가 있었고, 이에 대구광역시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현 위치에 옮겨 놓았답니다.

 

5. 다음은 칠성동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칠성동은 선사시대의 고인돌에서 유래되었답니다.

이곳에 고인돌  7개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북두칠성을 닮아서 사람들이 칠성바위라고 불렀으며 그 뒤로 칠성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24년에 발행된 대구읍성지에 의하면 1775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태영이 이 바위를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6. 첫째아들 이의갑이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즉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라(義拏)의 순위가 그것입니다.

울통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면 무관이 되었겠네요.

 

7. 둘째아들 이의두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그 뒤에 이의두의 후손이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와서 선조의 기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해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또 그 중앙에 정자를 세인 의북정이라 했답니다.

그러나 의북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해 헐려 버렸고 그때 심은 소나무만 노송으로 자랐는데 그 뒤부터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곳에 부귀다남을 빌었답니다.

 

8. 셋째아들 이의평이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즉 울통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자라서 무관이 되었답니다.

 

9. 넷째아들 이의승이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깨끗하고, 돌올하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것을보면 문관으로 출세했겠네요.

 

10. 다섯째아들 이의준이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깨끗하고, 돌올하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것을보면 역시 문관으로 출세했겠지요.

 

11. 여섯째아들 이의장이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깨끗하고, 돌올하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명 아들은 문관으로 출세했답니다.

 

12. 일곱째아들 이의라라고 새겨진 바위입니다.

깨어진 부분에 이름을 새겼는지 이름표시가 없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쓰여진 한 아들은 아무 벼슬도 못 하고 그저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고 하네요.

 

13. 대구역내 지하철역 4번출구로 올라오면 광장입구 화단에 쌍용그룹의 출발점이 된 칠성동 삼공유지 발상터 표시판이있습니다.

김성곤회장이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한데서 비롯되며, 1948년 금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기반이 확립 되었답니다. 금성방직은 6.25사변 당시 시설이 잿더미로 되었으나 전후 국내 최고의 방직공장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그 뒤 1962년 5월 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국가기간산업확충의 견인차가 되었으며, 쌍용그룹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1988년 7월 당시 쌍용그룹의 사업부에는 시멘트' 정유, 건설, 해운, 제지, 자동차, 기계, 전자등 총21개 회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한 현지법인이 13개, 해외지점이 15개, 전체 종업원수는 1만 7천여명이었습니다. 1986년 4월 건설된 싱가포르 래플스시티 건물은 '도시속의 도시'로 쌍용의 성가를 드높였습니다.        

 

 

대구역 칠성바위 주소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남로 30길 : 칠성2가 302-239 (지번).

연락처 : 7544 - 7788

입장료 : 무료.

교통편 : 지하철 ; 1호선 대구역 4번출구 도보 1분.

버스 ; 101, 101-1, 204, 304, 349, 401, 401-1, 410, 503, 618, 623, 651, 653, 706, 708, 730, 805, 북구2, 북구3, 가창2.

취재일자 : 2020. 7. 5.

찾아가는 길

※네이버지도에 대구역 표시해주세요!

 

출처 : 다음백과.

 

 

 

 

*칠성바위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남로 30길 : 칠성2가 302-239 (지번).

이곳의 바위들은 고인돌의 개석으로서 원래 대구역의 서남쪽에 유존하였던 것인데, 조선 정조때 경상감사 이태영은 꿈에 북두칠성이 북문밖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일곱 아들의 이름을 이 바위돌에 새겨 복을 빌었으며 이에 지역민들도 칠성바위로 부르면서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처로 이용하였고 칠성동의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구후 칠성바위는 1973년 시민회관의 신축을 계기로 발굴조사 되었으나, 별다른 유구나 유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시민회관 남쪽의 화단에 옮겨 보존 되었는데, 1998년에 칠성동으로의 이전요구가 있었고, 이에 대구광역시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현 위치에 옮겨 놓았다.

 

태평로 시민회관 앞 잔디밭에 놓여 있는 칠성바위는 지석묘로 이것은 옛 공회당서 남쪽 소나무 숲 사이에 있던 것이나 1973년 대구시가 광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지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지석묘는 탱석(撑石) 또는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시대 무덤으로 한반도 거의 전역에 분포돼 있다. 이것은 거대한 돌을 개석(蓋石)으로 하고 몇 개의 돌을 고여서 석실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매장했다.

대구에는 많은 지석묘사 있었으나 대구의 지석묘 분포 상황은 신천 범람원의 상류 쪽인 봉덕동에서 대덕동을 거쳐 삼덕동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하류 쪽인 교동과 태평로를 있는 자연제방 위에, 그리고 역시 상류 쪽인 상동, 중동, 하동을 있는 충적원(沖積源)에 무리를 이루어 연속하고 이밖에 비산동 구릉과 대당동, 아미산에도 지석묘가 있었다.

대구의 지석묘는 그 분포상황을 볼 때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선사시대 취락집단이 생활권 확로를 위해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기 집단의 존재를 나타냄과 동시에 커다란 바위를 세워 생활권 구역을 명확히 표시하는 상징적 기념물로도 삼았던 것 간다.

칠성바위는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오랜 세원이 흐르는 동안 아기 못 낳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는 민간 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는데 칠성암의 그 같은 영험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조 19년에서 21년까지 3年간 경상도 감사로 이태영(李泰永)이란 사람이 재직했다. 그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북문밖(대구읍성이 있을 때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는데, 북문은 지금 북성로 경북인쇄소 부관에 있었다)에 떨어져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난 이 감사는 비록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 이상해 별이 떨어진 북문밖을 나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커다란 바위가 북두칠성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감사는 이것이 필시 좋은 징조일 것이라 생각하길 7개의 바위에다 석공을 불러 자기 일곱아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겼다.

즉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라(義拏)의 순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일곱 아들이 차츰 장성함에 따라 얼굴이나 성품이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 가는 것이다. 즉 울통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자라서 무관이 되었고 깨끗하고, 돌올하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명 아들은 문관으로 출세했다. 그리고 그저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쓰여진 한 아들은 아무 벼슬도 못 하고 그저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 그 뒤에 이의두(李義斗)의 후손이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와서 선조의 기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해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또 그 중앙에 정자를 세인 의북정(依北亭)이라 했다.

그러나 의북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해 헐려 버렸고 그때 심은 소나무만 노송으로 자랐는데 그 뒤부터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곳에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다.

칠성동(七星洞)이란 동명은 칠성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칠성동의 유래

칠성동은 선사시대의 고인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곳에 고인돌 7개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북두칠성을 닮아서 사람들이 칠성바위라고 불렀으며 그 뒤로 칠성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24년에 발행된 대구읍성지에 의하면 1775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태영이 이 바위를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칠성바위와 운강고택

원래 칠성바위는 대구 칠성동에 흩어져 있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다.
7개로 구성된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로 부임해온 이태영(李泰永)이 꿈에 대구읍성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본 후, 그곳에 가보니 큰 바위 7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일곱 아들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 복을 빌었는데 이후부터 사람들이 칠성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 후손 중 한 명이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와서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의북정(依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칠성(七星)바위는 지금의 신지1리 운강고택(雲岡故宅 사진) 옆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장덕공(章德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과 무예를 두루 겸비하여 마을 주민들의 어려움을 의논하고, 해결해 주는 덕망 높은 사람이었다. 장덕공의 집에는 아들이 셋 있었다. 맏아들은 정하(庭夏), 둘째는 정은(庭殷), 셋째는 정주(庭胄)이다. 이 세 아들은 장성하여 분가를 하게 되었다.
세째 아들 정주는 돌무더기가 있는 밭 3마지기를 물려 받았다. 이날부터 돌무더기 치우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았다. 돌을 치우다보니
그 속에 큰 바위 일곱 개가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치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그의 부인 월성 김씨가 말하기를 이 칠성바위는 하늘이 주신 보물입니다.
칠성신은 재복을 주는 것이니 "우리는 이 칠성바위를 잘 보존합시다" 하여 주위를 꾸미고,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칠성바위 주위에서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절을 하여 축원을 빌고, 제사를 지냈다.
정주는 본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맏형을 부모같이 공경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밭에서 과일을 수확하면 형님들께 먼저 가져다 드리고, 그런 후에 자기가 먹었다.
운문면 순지리 처가에 왕래하면서 항상 포대를 가지고 다녔다.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쇠똥, 개똥을 주어 담고, 또 다른 거름이 될만한 잡물들을 가득 담아 오곤 하였다. 가져온 거름들을 밭에다 내고, 또 열심히 일을 하여 재산을 크게 늘였다.
살림이 윤택하게 되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이웃에 많은 재물을 나누어주곤 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형님들께 나누어주고, 새로이 집을 지을 때는 자기집 보다는 형님들의 집을 먼저 지어 주고, 그런 후에 자기 집을 지었다.
집을 지을 때 칠성바위를 동쪽 내당 뒤에 모시도록 지었다. 이때 지은 집이 후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정주는 자식 삼형제를 두니 첫째 시묵, 둘째는 보묵, 셋째는 기묵이다.
기묵은 공부하여 이름을 떨쳤고, 그의 맏손자는 재현인데 열심히 공부하여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기고, 아들 칠형제를 두어 모두 벼슬을 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 칠형제는 칠성바위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전한다.
칠성바위의 유래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옛집은 지금의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호)이다. 이 운강고택은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내당 뒤에는 칠성바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출처 : 일간경기

 

 

*삼공유지 발상터

대구역내 지하철역 4번출구로 올라오면 광장입구 화단에 쌍용그룹의 출발점이 된 칠성동 삼공유지 발상터 표시판이있습니다.

김성곤회장이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한데서 비롯되며, 1948년 금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기반이 확립 되었답니다. 금성방직은 6.25사변 당시 시설이 잿더미로 되었으나 전후 국내 최고의 방직공장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그 뒤 1962년 5월 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국가기간산업확충의 견인차가 되었으며, 쌍용그룹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1988년 7월 당시 쌍용그룹의 사업부에는 시멘트' 정유, 건설, 해운, 제지, 자동차, 기계, 전자등 총21개 회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한 현지법인이 13개, 해외지점이 15개, 전체 종업원수는 1만 7천여명이었습니다. 1986년 4월 건설된 싱가포르 래플스시티 건물은 '도시속의 도시'로 쌍용의 성가를 드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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