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혈에 좋은 동백나무(산다화)의 효능, 열매....
-동백나무
-동백나무의 효능
-동백나무로 치료방법
-동백 아가씨/가수 이미자
1.동백나무 열매1:올해여름에 찍었습니다~~~
2.동백나무 명패
3.동백나무 열매2
4.동백나무 열매3
5.동백나무 열매4
6.동백나무 열매5
7.동백나무 열매6
8.동백나무 열매7
9.동백나무 열매8
10.동백나무 열매9
11.동백나무 열매10
12.동백나무 열매11
13.동백나무 열매12
14.동백나무 열매13
15.동백나무1
16.동백나무2
17.동백나무 꽃과 꿀벌:올해 봄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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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Camellia Japonica)
1분류:차나무과
2.꽃말:자랑,겸손한 마음
3.분포:아시아
4.서식:해안 근처 산지
5.효능:토혈,코피,자궁출혈,대변출혈,화상에 사용함.
6.설명:때때로 줄기 밑동에서 많은 가지들이 나와 관목처럼 자라기도 한다. 수피(樹皮)는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며 미끈하다. 잎은 가죽처럼 두껍고 어긋나며 앞면은 광택이 나는 짙은 초록색이나 뒷면은 노란색이 섞여 있는 초록색이다. 잎가장자리에는 끝이 뭉툭한 톱니들이 있다. 꽃은 빨간색이며 겨울에 1송이씩 잎겨드랑이나 가지끝에 핀다. 꽃잎은 5~7장이지만 꽃잎의 아래쪽은 서로 감싸고 있으며 꽃받침잎은 5장이다. 수술은 많고 기둥처럼 동그랗게 모여 있으며 수술대는 흰색, 꽃밥은 노란색이다. 암술대는 3갈래로 갈라졌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가을에 구형(球形)으로 익으며 3갈래로 벌어지는데 그속에는 진한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꽃의 밑에서 화밀(花蜜)이 많이 나오며 동박새가 이것을 먹는 틈에 꽃가루받이가 일어나므로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이다. 한국·일본·타이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제주도 및 중부 이남의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데 바닷가를 따라 서해안 어청도까지, 동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올라와 자란다. 특히 울산광역시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목도(目島)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동백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섬의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 대청리의 동백나무숲은 동백나무의 북한계선으로 천연기념물 제66호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의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제151호로,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의 동백나무숲은 제169호로, 전라남도 고창군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제 184호로, 경상남도 거제시 학동리의 동백나무숲은 제 233호로 각기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전라남도 여수시의 오동도 또한 동백나무숲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나무·소나무·매화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듯이 다른 식물이 모두 지고 난 겨울에 피는 동백꽃을 추운 겨울에도 정답게 만날 수 있는 친구에 빗대어 세한지우(歲寒之友)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재(盆栽)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는데, 생장속도는 느리지만 그늘지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잘 자라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므로 가지치기를 많이 해도 잘 견딘다. 공해나 소금기에도 강하다.
옛날에는 동백나무 씨에서 기름을 짜서 등잔기름·머릿기름 또는 약용으로 쓰기도 했다. 이밖에 혼례식 상에서 동백나무를 대나무와 함께 자기항아리에 꽂아 부부가 함께 오래 살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동백나무의 효능
강심작용, 항암작용, 장출혈, 자궁출혈, 토혈, 해수, 코피, 대변 출혈, 아메바성이질, 타박상, 화상, 부스럼, 머릿기름, 식용유, 등유, 유두(乳頭)가 짓물러서 갈라지고 통증이 심한 증상에 효험있는 동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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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아가씨/가수 이미자
1.가수 이미자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외모지만 노래만큼은 최고였다. 타고난 미성에 꾸밈없는 그녀의 애절한 창법은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추앙 받는 이미자에게는 엘레지의 여왕, 살아있는 트로트의 역사, 국민가수라는 찬사가 늘 따라다닌다.
2.대표 곡은 역시 ‘동백아가씨’. 최초로 100만장 음반판매시대를 연 영광스런 노래이건만 한동안 왜색(일본풍)가요로 금지의 낙인이 찍혀 깊은 좌절을 안겨준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500여장의 음반과 2,000 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해 한국 최다음반, 최다 취입곡 가수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이미자는 우리 가요사상 최고의 여가수중 한 명이다.
3.이미자는 서울 한남동에서 1941년 7월 22일 을지로 화원시장에서 일했던 부친 이점성씨와 모친 유상례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불화로 4살 때 생모와 이별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60년대 당시 신문, 잡지에는 ‘6살 때부터 이미자는 서커스단에서 끼니를 굶어가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극장주들은 2,000원이던 극장 출연료의 20배가 넘는 5만원에라도 이미자를 모셔가기 위해 사활을 건 출혈 경쟁을 벌였다. 연주비 조차 없어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했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도 메이저급 회사로 동반 상승했다. '동백 아가씨'에는 취입 때부터 갖가지 사연이 만발했다.
5.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한 지구의 임정수 사장은 생소한 지구보다는 중견회사인 미도파레코드 이름으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 그런데 음반이 공전의 히트를 터뜨리자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 문제를 거론하며 소송을 걸어와 곤혹을 치렀다. 미도파와 지구 두 회사의 같은 '동백아가씨'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이 같이 복잡한 사연 때문.
6.1964년 겨울, 대학생들이 주고객 층인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과 서린 동경 음악실. 트롯을 천시했던 이곳의 젊은 멋쟁이들조차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이미자는 '울어라 열풍아'등 후속 발표 곡마다 인기 퍼레이드를 벌었다.
7.인기 가수로 떠오르자 성남극장, 우미관, 노벨극장, 금호극장등 하루에 극장 네 곳을 매일 한바퀴 도는 바쁜 몸이 되었다. 64년 9월 첫 딸 재은을 낳은 이미자는 1년 사이에 아담한 집과 전화, TV, 자동차를 한꺼번에 마련할 만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8.그녀는 "사는 즐거움과 일하는 보람을 느꼈던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65년 말 '동백아가씨'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고 66년 '섬마을 선생님'도 뒤를 이어 판매 금지 당했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까지 하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 왔다.
9.아이러니한 것은 금지 처분을 받은 '동백아가씨'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 대중 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금지곡 가수이면서 정상의 가수였던 그녀는 월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1순위로 뽑혀 다섯 차례나 파월 장병들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10.이때의 공로로 73년 방한한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베트남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66년 이미자의 소문을 들은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음반 취입을 제의를 해왔다. 현해탄을 건너 가, '동백아가씨'와 현지에서 받은 곡을 일본 노래로 취입했다.
11.'동백아가씨'는 '사랑의 빨강 등불'로 일본 정서에 맞도록 제목과 가사 내용이 변경되고 이미자는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되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후 반일 감정이 악화된 시절. 이 사건은 반일 감정에 거센 기름을 붓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자를 즉시 송환시켜라', '왜색 노래가 이제야 제 나라 찾아 갔다'는 극단적 반응이 불거져 나왔다.
12.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을 받았다. 대중 음악은 한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정서와 밀접하게 연관돼 사회를 반영함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13.촉망받는 작곡가 박춘석이 자청해 전속사를 옮겨 오면서 더욱 가속이 붙은 이미자는 66년도엔 '흑산도 아가씨'등으로 가요계를 석권하고 67년에는 최고의 히트곡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는 절정기를 구가했다.
14.68년에는 제일교포 위문차 두 번째로 일본 공연 길에 올라 후지 TV에 출연했다. 상복도 유난히 많았다. 64년부터 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 중 3번은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가 받지 못한 가요계의 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5.그러나 69년은 끔찍했던 한 해. 빅 히트곡 '기러기 아빠'가 또다시 방송금지 되었을 뿐 아니라 6월에는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앞길에서 대형 교통 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연말에 취입곡이 1,000곡을 넘어선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혼 이후 크고 작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이미자는 KBS PD 김창수씨와 재혼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16.87년 8월 '동백아가씨',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이 한꺼번에 금지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생기를 되찾은 이미자는 89년 10월 순수 예술계의 반발을 딛고 최초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서 30주년 기념공연을 여는 쾌거를 이뤄냈다. 91년엔 SBS 라디읏【?'이미자의 가요 앨범'을 맡아 DJ로 변신을 하기도 했다.
17.95년엔 제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문화훈장을 받고 97년에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히트곡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까지 세워졌다. 99년엔 노래인생 40년을 총 정리하는 기념 앨범과 자전 에세이를 발표했다. 2002년에는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평양 특별공연'을 남북 동시 생중계로 방영해 민족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노래들은 역경의 삶에서 나오는 애절함과 꾸미지 않는 순수함으로 남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가슴을 울려왔다.
18.흔히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감정 표현이 직설적인 성격,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요계의 대모로 44여 년 동안 국민 가수로 칭송 받는 이유는 '당일 날 곡을 받아 가사를 외우고 취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처럼 실력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 가요의 산증인 이미자는 '전통 가요'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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