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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여행] 대구시 중구 도심에 조선 선비의 남은 흔적 문우관 & 상덕사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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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선비의 남은 흔적 문우관 & 상덕사 비각 -

*대구광역시 남산동 도심속에 조선선비들의 남은 흔적 문우관 & 상덕사 비각을 소개합니다.

문우관 & 상덕사 비각은 대구시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 남산100년 향수길에 포함됩니다.

 

 

 

1.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문우관과 상덕사비각은 근대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족과 돌아보기 좋은 곳입니다.

 

2. 중구 남산동 계산오거리에서 남문시장 네거리를 지나 남산100년 향수길 까지 인도블럭에는 '남산100년 인쇄골목' 과 '남산100년 향수길' 황동판이 5m 간격으로 병행 설치되어 있습니다. 

 

3. 중구 계산오거리에서 남산동 인쇄골목으로 접어들어 남문시장 쪽으로 가면 왼쪽에 보이는 인터블고코아시스 오피스텔이 바로 1950~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옛 동산양말 공장터입니다.

 

4. 인터블고코아시스 오피스텔 모퉁이에 있는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해 60m쯤 가면 좌측에 퇴락한 고가 두 채가있습니다. 

 

5. 안내판과 진덕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문우관과 상덕사비각입니다.

 

6. 내노라 하는 영남선비들 모여 시회를 벌였던 처사들의 사랑채 대구 도심의 한 고가를 찾아왔습니다.

 

7. 1988년 담장, 화장실 등과 함께 보수한 진덕문입니다. 

평소에는 출입이 통제되는데 문우관 사장님의 도움으로 내부를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심속에 이런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것만으로도 기쁩니다.

 

8. 문우관 이 학당은 한일합방 후 대구의 낙육재와 양사재가 폐허가 되어 선비들이 돌아가 의지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채헌식이 1914년 상덕각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학할 장소를 삼고 해마다 봄, 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강론하는 규례를 정하여 시행하고, 1918년 구달서와 선현을 높이고 유학을 보위하며 윤리를 밝히고 학문을 진흥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하였습니다.

 

 

9. 문우관의 명칭은 높이며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는 말에서 취하였습니다.

       

10. 문우관 맞은편 이 건물은 창고로 쓰고있습니다.

 

11. 상덕사 비각은 조선시대 이지역의 관리로 부임했던 이숙, 유척기를 기리고자 만든비가 상덕사비각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관리로 있을적에 지역의 학문증진과 백성들의 삶 개선에 노력을 많이 했을뿐 아니라 지역사람들에게 신망이 많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건립한 상덕사의 비석을 보존하는 곳으로써 상덕사는 원래 옛 대구 이사청 자리에 있었으며 대구 이사청 건립으로 인해 없어지고 상덕사비와 비각만 현재의 위치로 이건해 상덕사의 자취를 알려지고 있답니다.

 

12. 상덕사는 조선 현종13년에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하였던 이숙을 배향하고자 경상감영 동편에 세운 사당이며 그곳에 선정비도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이 고을에는 대흉년이 들었고 그는 진정한 목민관의 자세로 주민들을 보살펴 주었고 문우관을 세워 지방의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필요경비 부담은 물론 최대한 지원을 하여 주었으며 학전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운 것입니다.

매년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문우관에선 좌장격인 김홍영 처사 주도로 이숙과 유척기의 유덕을 기리는 향사가 봉행됩니다.

 

13. 당시에는 기호지방의 서인과 영남지방의 남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고 이숙관찰사는 서인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은 이를 괘념치 아니하고 그의 선정을 기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영조13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서인 소속의 유척기도 상덕사에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1910년 일제가 그 자리에 대구이사청을 건립하면서 상덕사를 헐어 버렸고 비각과 문우관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남인들의 지역에서 이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목민관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선정을 베풀었던 이숙과 유척기의 선정에 너무나 고마운 마음으로 유림과 주민이 생사당을 세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14. 1988년에 새로 보수한 화장실입니다. 

 

15. 문우관 내부에서 바라본 진덕문입니다.

 

16. 문우관에 특별한 나무 한 그루 고매가 있습니다.

교수들도 해석이 막히면 찾아온다는 김홍영입니다.

그는 스스로 유명해봄직도 하지만 늘 하신하며 문우관 고매로 산답니다.

 

17.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매열매입니다.

 

18. 1988년에 새로 식재한 모란입니다.

 

19. 진덕문 주변에 백목련은 한여름에도 일부 꽃을피우고 있습니다.

 

20. 여름 꽃인 배롱나무와 흑장미도 꽃이 피었습니다.

 

 

 

*상덕사 비각 & 문우관. 

- 대구 도심속 가볼 만한 곳 상덕사비각 & 문우관 -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 남산100년향수길에 속하는 상덕사비각과 문우관의 도심속 조선선비의 남은 흔적을 소개합니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상덕사비각과 문우관은 근대 모습이 잘 보조되어 있어 코스로 돌아보기 좋은 곳입니다.

대구에도 구석구석 살펴보면 돌아보기 좋은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구 도심에 가볼만한 곳 이곳은 조선시대 이지역의 관리로 부임했던 이숙, 유척기를 기리고자 만든비가 상덕사비각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관리로 있을적에 지역의 학문증진과 백성들의 삶 개선에 노력을 많이 했을뿐 아니라 지역사람들에게 신망이 많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건립한 상덕사의 비석을 보존하는 곳으로써 상덕사는 원래 옛 대구 이사청 자리에 있었으며 대구 이사청 건립으로 인해 없어지고 상덕사비와 비각만 현재의 위치로 이건해 상덕사의 자취를 알려지고 있답니다.

*상덕사 비각은 167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숙과 1726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유척기의 선정을 기념하여 경상도 백성들이 건립한 상덕사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한 집입니다.

상덕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문은 조인영이 찬술하였습니다.

상덕사는 원래 옛 대구이사청 자리에 있었는데 대구이사청 건립으로 인하여 없어지고 상덕사비와 비각만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상덛사의 자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문우관 학당은 한일합방 후 대구의 낙육재와 양사재가 폐허가 되어 선비들이 돌아가 의지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채헌식이 1914년 상덕각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학할 장소를 삼고 해마다 봄, 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강론하는 규례를 정하여 시행하고, 1918년 구달서와 선현을 높이고 유학을 보위하며 윤리를 밝히고 학문을 진흥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하였습니다.

문우관의 명칭은 높이며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는 말에서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우관은 일제시대때 지역의 전통 교육기관이 폐쇄되자 지역 문인들의 학문을 연마할곳이 없었으며 채헌식 선생이 선비들을 모아 학문수양을 시작한 곳이라고 합니다. 문우관의 명칭은 국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라는 뜻입니다. 해설가님 설명으로는 지금도 공부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우관 사장님 도움으로 내부를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심속에 이런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것만으로도 기쁩니다.

 

 

*문우관

내로라 하는 영남선비들이 모여 시회(詩會) 벌였던 처사들의 사랑채 대구 도심의 한 고가를 찾아왔습니다.

중구 계산오거리에서 남산동 인쇄골목으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보이는 아파트가 바로 

1950~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옛 동산양말 공장터입니다. 좌회전해 60m쯤 가면 좌측에 퇴락한 고가 두 채가 있습니다.

문우관(文友觀)과 상덕사(尙德祠) 비각입니다.
문우관은 1918년 인천인 채헌식(蔡憲植)이 향교 재산으로 건립한 서숙(書塾)입니다.

매년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문우관에선 좌장격인 김홍영 처사 주도로 이숙과 유척기의 유덕을 기리는 향사가 봉행됩니다.
문우관은 50~60년대 영남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한 달에 한 차례 모여 시회를 벌인 처사들의 사랑채였습니다. 문우관은 근처 남산동 향교에서 다 소화시키지 못한 경전강좌까지도 떠맡았답니다.

문우관의 기품은 영남 낙육재(樂育齋)에서 건너옵니다. 낙육재는 경상감사 조태억이 1721년(경종 1년)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해 대구부 남문 밖 현 문우관 일대에 세운 대구 첫 관립도서관입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지방제도의 재편과 일제통감부 설치로 낙육재도 폐쇄됐다가 1900년 향교 내에 복원되었습니다.

상덕사 비각도 원래 경상감영공원 내에 있었습니다. 1910년 일제가 대구이사청(현 대구시청의 전신) 신축 때 문우관 경내로 옮겼습니다.
현재 문우관 외관은 무척 옹색해 보입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쇠락의 길을 걷었습니다. 빈 공터에 달셋방이 들어서기도 했답니다. 문우관이 살림집으로 전락해버린 걸 애석하게 생각한 대구시 등이 나서 문우관 살리기에 나섰습니다.

1988년에서야 담장, 진덕문, 화장실 등이 보수되었습니다. 문우관 마당에는 예전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를 거의 볼 수 있게 대나무, 매화, 국화, 라일락, 모란, 천리향, 목련 등을 식재했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습니다. 교수들도 해석이 막히면 찾아온다는 김홍영입니다. 그는 스스로 유명해봄직도 하지만 늘 하신하며 문우관 고매(古梅)로 산답니다.

매주 화·금요일 오전 8시와 오후 6시, 10여명의 학인들이 김 처사로부터 퇴계문집을 배운답니다. 아주 추운 날 군불 넣고 그걸 벗하며 하루 묵어도 좋은 고가입니다.

 

 

*상덕사비각

대구동부교육구청 아래쪽 인근 남산동 인쇄골목으로 가는 길에 상덕사비각과 문우관이란 안내판과 작지만 예전 건물이 보입니다.

남산교회를 지나 오른쪽의 내리막길을 따라 가도 시골집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옛날 집이 나옵니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 570 번지에 위치한 고가가 상덕사비각과 문우관입니다.

상덕사(尙德祀)는 조선 현종13년(1672년)에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하였던 이숙(1626-1688)을 배향하고자 경상감영 동편에 세운 사당이며 그곳에 선정비도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이 고을에는 대흉년이 들었고 그는 진정한 목민관의 자세로 주민들을 보살펴 주었고 문우관을 세워 지방의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필요경비 부담은 물론 최대한 지원을 하여 주었으며 학전(學田)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기호지방의 서인과 영남지방의 남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고 이숙관찰사는 서인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은 이를 괘념치 아니하고 그의 선정을 기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영조13년(1737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서인 소속의 유척기(兪拓基 1691-1767)도 상덕사에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1910년 일제가 그 자리에 대구이사청을 건립하면서 상덕사를 헐어 버렸고 비각과 문우관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남인들의 지역에서 이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목민관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선정을 베풀었던 이숙과 유척기의 선정에 너무나 고마운 마음으로 유림과 주민이 생사당을 세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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