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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 중구여행]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대구광역시 중구 베스트경관 20선 중 16선 대구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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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에 2500년 전 옛날 선조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던 대구향교를 소개합니다.

주소 :  대구 중구 명륜로 112 : 남산동 735-4 (지번)

전화 :  053-422-8700

문화재 지정 : [대구향교 대성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1982.03.04)

대구광역시 중구 베스트경관 20선 중 16선

개문 : 08:00

폐문 : 17:00

 

 

1.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7년 에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지방 교육 기관으로  창건되어, 성현들의 위폐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2. 매년 춘추로 석전 대제를 봉행하는 대성전과 학문을 강의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명윤당, 자매도시인 중국의 청도시가 기증한 공자상이 있으며, 전통혼례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3.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교동에 처음 건립되었습니다. 그 뒤 달성공원으로 옮겼으며, 선조38년(1605년)년에 다시 교동으로 옮겨 지었다고 해요. 


4. 대성전은 1932년 시가지 확장함에 따라 지금 자리에 옮겼습니다.


5. 교동에 있을때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방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왼쪽에 명윤당 오른쪽에 대성전이 있는 좌학우묘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위의 건물은 동무입니다.


6.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입니다. 

특히 대성전이 화려한 다포식을 취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위의 건물은 서무입니다.


7. 내삼문은 대성전의 정문입니다.


8. 동소문은 대성전의 소문입니다.



9. 명륜당(明倫堂)에는 동서재(齋)가 있습니다.


10. 명륜당은 앞 5칸, 옆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성전과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향교 안에서 대성전과 나란히 꼽히는 기본건물로써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도의를 닦던 곳입니다. 교동에서 이건되기 직전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이 뒤에 오는, 경주향교(慶州鄕校)나 경산향교(慶山鄕校)와 같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1931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에는 성주향교(星州鄕校)와 같이 대성전 옆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를 갖추게 되었답니다. 건물이 노후되자 1974년콘크리트 와즙으로 중건하였답니다.


11. 명륜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왼편에 있는 것이 동재, 오른편에 있는 것이 서재입니다. 동서재는 앞 4칸,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좌우 한칸씩 창문이 있고 가운데에 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서로 위치한 재는 명륜당의 부속 건물로써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답니다.


12. 원래 향교를 건축할 때 함께 세워졌으나 1932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 다시 건립되지 못했답니다. 이후 1990년에 낙육재를 지으면서 동서재 또한 함께 재건하였습니다. 명륜당과 동서재 사이의 공간은 향교에서 여는 한문이나 고전 강독, 한시 경연대회 및 전통혼례와 같은 가정의례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13. 이곳은 부속건물 사무실입니다.

대구향교 전통혼례 접수처는 053-425-3912입니다.

 

14. 공자상은 명륜당에서 동서재로 나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옆문 앞에는 2.53m의 공자상이 향교 외삼문을 마주보고 세워져 있는데, 대구향교의 공자상은 1997년 중국 산둥 성(山東省 칭다오 시) 청도 시(靑島市)에서 대구광역시와의 자매결연 5주년을 기념해 백옥(白玉)으로 제작하여 기증한 것입니다.


15. 양사재(養士齋) 창건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교동이며 향교 구내 동신문 바깥입니다.  

조선시대 영조(英祖) 병술(1766년)에 대구 판관(시장) 김노(金魯)에 의해 설립되으며, 영조 정해(1767년) 7월에 관찰사(지사) 김응순(金應淳)이 기문을 쓰고 무자(1768년) 늦봄에 판관 김노도 기문이 썼습니다.

매년 춘추로 본향내의 유생들을 선발하 기숙케 하고 강학 하였으며, 향교에서 향시(鄕試)를 치를시는 과장으로 사용한 곳입니다.


16. 그후 1991년 12월 28일 이 곳에 양사재를 복원 하였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층 32평 하층 46평으로 재건하였습니다. 

상층은 대구향교 여성회 여성예학연구원의 양사재 하층은 대구향교 소속 여성유도회와 여성예학연구원의 교육도장으로 사용하고 있고, 하층은 향교 서예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7. 낙육재(樂育齋)

지방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영남 낙육재는 1721년에 설립된 관립도서관의 효시로서 재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등 학문 연구에 큰 공적을 남긴 곳입니다. 경종 원년(1721년) 경상감사(지사) 조태억(趙泰億)이 인재 양성과 문풍진흥을 목적으로 당시 대구부 남문밖(현재 대구시 남산동 문우관에서 동산양말공업사 일대)에 설립하였는데, 이곳에서 경상도내의 유능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며 독서와 학문 연구에 이바지하게 하였습니다. 영조8년 (1732년) 조현명 감사가 중수하였고, 순조7년 에는 윤광안 감사가 제내의 서고인 장서각을 창건하였으며 다시 고종조 염세영 감사가 1897년에 중수하였답니다. 


18. 1894년 갑오경장으로 지방제도가 개편되고,일제 통감부 설치후에는 조선인들의 모든 학교 운영을 방해 함으로 인해서 낙육재를 철폐시키고, 그 재산으로 협성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전신)을 설립하고 소장되었던 장서는 모두 764책으로 현재 대구 시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답니다. 낙육재는 독서,시,부,제술연구 등의 기능을 가졌으나 문묘나 사묘가 없는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90년 10월 7일 대구광역시 보조금과 대구향교재단 자체자금으로 향교 경내에 재건하었답니다.


19. 유교회관은 대강당으로 사용하며, 명륜대학 예절대학도 운영합니다.


20. 유교회관 일부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으로 사용합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무료로 안내하여 드립니다.

2월부터 11월까지 설연휴 추석연휴를 제외하고 매일 근무합니다.

해설시간은 10:00~17:00 입니다.

10인 이상이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경우 수시 안내해드립니다.

단체예악 문의는 053-256-6407입니다.


21. 외삼문은 대구향교의 정문입니다.


22. 중구에 있는 대구향교는 오늘날에도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한문교육, 예절교육 등을 담당하는 다양한 전통교육장으로 또한 전통혼례식장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대구향교

주소 :  대구 중구 명륜로 112 : 남산동 735-4 (지번)

전화 :  053-422-8700

문화재 지정 : [대구향교 대성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1982.03.04)

1398년(태조 7)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교동(校洞)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향교가 대구부 동쪽 2리에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조정과 사림이 추진한 오현종사(五賢從祀)에서 정인홍(鄭仁弘) 등이 오현에 든 인물 가운데 이황(李滉)이나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일었을 때, 선조 37년(1604년) 대구향교에서도 유생들이 모여 해당 문제를 논의하고 품정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모당집》).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인조(仁祖) 3년(1625년)에 향교의 명륜당을 중건하였습니다. 순조(純祖) 6년(1806년) 경상도관찰사가 된 윤광안(尹光顔)이 그 해 양월(10월)에 향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했다는 기록이 칠곡의 유생 이동급(李東汲)의 문집 《만각재집》(晚覺齋集)에 남아있습니다. 1932년에 총독부에 의해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등 주요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문묘·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 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築城碑)와 수성비(修城碑), 경상도관찰사·판관·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송덕비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의 위패를, 동무·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인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대성전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974년 명륜당과 삼문, 사무실이 중건되었으며, 1981년에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재단법인 대구직할시 향교재단 설립을 인가받았습니다.

1990년에는 동·서재와 낙육재가 복원되었다.1995년에 유림회관을 신축하였습니다.

주요건물은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문묘 · 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 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와 수성비, 경상도관찰사 · 판관 · 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 · 송덕비 등이 옮겨져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공문10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한국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 동서재(齋)

앞 5칸, 옆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과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향교 안에서 대성전과 나란히 꼽히는 기본건물로써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도의를 닦던 곳입니다. 교동에서 이건되기 직전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이 뒤에 오는, 경주향교(慶州鄕校)나 경산향교(慶山鄕校)와 같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1931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에는 성주향교(星州鄕校)와 같이 대성전 옆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건물이 노후되자 1974년콘크리트 와즙으로 중건하였습니다.

명륜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왼편에 있는 것이 동재, 오른편에 있는 것이 서재입니다. 동서재는 앞 4칸,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좌우 한칸씩 창문이 있고 가운데에 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서로 위치한 재는 명륜당의 부속 건물로써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향교를 건축할 때 함께 세워졌으나 1932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 다시 건립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1990년에 낙육재를 지으면서 동서재 또한 함께 재건하였습니다. 명륜당과 동서재 사이의 공간은 향교에서 여는 한문이나 고전 강독, 한시 경연대회 및 전통혼례와 같은 가정의례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명륜당에서 동서재로 나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옆문 앞에는 2.53m의 공자상이 향교 외삼문을 마주보고 세워져 있는데, 대구향교의 공자상은 1997년 중국 산둥 성(山東省 칭다오 시) 청도 시(靑島市)에서 대구광역시와의 자매결연 5주년을 기념해 백옥(白玉)으로 제작하여 기증한 것입니다.

양사재(養士齋)

영조(英祖) 43년(1766년)에 대구 판관 김노(金魯)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관찰사 김응순(金應淳)과 김노 자신이 쓴 기문이 남아 있습니다.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고을 내의 유생들을 뽑아 기숙하게 하면서 이곳에서 학문을 강의하였고, 향시(鄕試) 때마다 시험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91년 12월 28일, 현재의 자리에 상층 32평, 하층 36평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지상으로 드러난 양사재 건물은 앞 5칸에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는 통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교동, 향교 구역 내의 동신문(東神門)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양사재 하층은 대구향교 소속 여성유도회와 여성예학연구원의 교육도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낙육재(樂育齋)

경종(景宗) 원년(1721년)에 경상감사 조태억(趙泰億)이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 세웠고, 경상도 지역의 유생들을 뽑아 기숙시키며 독서 및 학문 연구를 지원하였습니다. 건립 당시 낙육재는 대구향교와는 독립된 건축이었습니다. 독서와 시부(詩賦)의 제술, 연구 등의 기능이 있었던 교육기관임에도 향교와는 달리 문묘(文廟)나 사묘(祀廟)를 따로 두지 않았던 것이 특징입니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10년(1906년) 통감부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1990년 10월 7일에 대구시 보조금 및 대구향교재단의 자체자금으로 향교 내에 양사재 옆에 재건되었습니다. 앞 5칸, 옆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은 통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낙육재가 철폐될 당시 낙육재의 재산은 협성학교 설립에 쓰였고, 소장되어 있던 장서(전 764책)는 현재 대구향교와 대구부립도서관을 거쳐 현재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해당 도서관의 고문헌 보관실 명칭의 유래도 낙육재에서 온 것입니다).




*웃자퀴즈 501 : 가장 더러운 강은? 정답:요강.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매주 월요일 정답 공개 합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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