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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대구시 블로그 기자

대구 여행 -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 대구읍성길 6개 대문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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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읍성길 -

조선시대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었던 대구읍성길이 재현 되었습니다.

중구청이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을 시행하면서 옛날 읍성 축조 당시에 사용되었던 같은 종류의 돌을 성벽 의미지로 재현하였답니다.

시원한 가을날 대구읍성길 6개대문 2.7km를 한번 트레킹 해볼까요~~~

 

 

1. 대구읍성 당시 성벽의 총길이는 2.7Km(2,124보), 서남높이 3.8m(18척), 동북높이 3.5m(17척) 이었답니다.

 

2. 이곳은 서성로 대구읍성길 인데요.

서성로에는 도로 중앙분리대를 이용하여 당시 대구읍성의 실제돌로 만들어 성곽을 재현하였답니다.

 

3. 이곳은 당시 대구부성의 달서문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달서문 표지석은 구 삼정헬스사우나 모퉁이 화단에 있었는데요.

지금은 재개발사업 공사장 안에 있어서 사진을 담을 수 없습니다.

당시 달서문 밖에는 조선시대 전국 3대 장터 서문시장이 있었답니다.

옛 이름은 대구장으로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중기 전국 3대장터 중 하나였다지요.

 

4. 이곳은 당시 대구부성의 서소문이 있었던 자리였답니다.

현재 위치는 북성로 다원송풍기 앞 네거리입니다.

 

5. 이곳은  당시 대구부성의 공북문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현재 위치는 북성로 금성종합기계 네거리입니다.

북성로는 대구의 공구골목으로 유명합니다.

 

6. 이곳은 대구읍성 상징조형물 인데요.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대구읍성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널리 알리고, 기존 지하철 환기구를 활용함으로써 도시미관을 개선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답니다.

조형물 벽면에는 대구읍성의 성문, 축조연혁, 시대상을 소개하고, 미디어 영상물에는 대구읍성과 경상감영, 순종황제어가길, 대구의 과거와 현재, 대구의 1920~30년대 모습, 향촌동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표현하고있답니다.

 

7. 이 대구읍성길 바닥돌은 대구읍성의 성벽이 있었던 자리를 인도의 바닥에 동성로는 화강암돌 5열로 남성로 북성로는 3열로 이미지화 한 장대석이랍니다.   

또한, 황동마크는 대구읍성길 장대석에 10m마다 1개씩 있으며, 황동마크 안쪽 대구읍성 성곽지도에 굵은선 부분은 현재의길 위치표시인 북성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8. 이곳은 동장대(정해루)가 있던 자리인데요.

현재는 대구읍성거리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구읍성거리박물관에는 조감도,읍성지도,읍성돌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9. 이곳은 당시 대구 부성의 진동문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현재 위치는 제일은행 동성로지점 네거리입니다.

동성로와 남성로는 인도가 넓어서 인도바닥에 황동 표식판을 묻어 놓았습니다.

진동문 표식판의 크기는 약1m 정도이며 문자와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10. 이곳은 당시 대구부성의 동소문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황동으로 만든 동소문 표식판의 크기는 약1m 정도이며 문자와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위치는 감자유학건물 네거리입니다.

 

11. 이곳은 당시 대구부성의 남문이자 정문인 영남제일관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현재 위치는 약전골목 정관장 앞 네거리입니다.

영남 제일관은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만촌동)에 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 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칭하였답니다.

그 후 1870년 중수하여 성벽 위에 누각 4개를 세웠지만, 1906년 헐어버렸으며, 1980년 만촌동에 지금의 영남제일관을 중건하였답니다.

 

대구읍성길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일원.

입장료 : 무료.

교통편 : 지하철역 ; 반월당역 1,2호선, 1호선 대구역, 1호선 중앙로역. 

버스 ; 204, 304, 349, 401, 405, 609, 840, 909, 990, 북구2, 급행2, 등등.

취재일자 : 2020. 10. 7.

 

참고자료 : 다음백과.

 

※네이버지도에 대구읍성길 표시해주세요.

 

 

 

*대구읍성

대구읍성(大邱邑城)은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에 있었던 읍성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처음 쌓았던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대구부에 자리잡은 경상감영을 보호하는 치소로서 여러번 중수되다가, 외교권 피탈 뒤인 광무6년(1906년) 10월,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서리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등에 의해 불법 철거되었다.

2014년 4월 4일, 대구광역시는 경상감영 · 대구부 관아 · 대구읍성 복원에2020년 까지 400억을 투입한다는 경상감영 복원 정비사업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개요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鎭東門) · 달서문(達西門) ·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 · 공북문의 4대문(大門)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 · 서 2소문(小門)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 · 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습니다.

읍성 안으로 북동쪽에는 경상도 전체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客舍) 달성관(達城館)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조선 후기에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시장이었다.

달성관 앞마당에서는 매년 2월에 대구에서 약령시가 열릴 때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찾아드는 큰 장이 열렸는데, 이미 장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사람과 말이 몰려들기 시작해 읍성의 북문부터 남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성안에서 서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집집마다 상점이 열리고, 작은 공터에까지 노점이 세워졌다. 수백 마리의 말과 수만 명의 상인이 최소 한 달을 대구에 머물렀고, 비단 약재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여각이나 주막, 그 밖의 많은 상점들이 호황을 누렸던 당시의 대구에서는 "대구 상인들은 약령시 열리는 한 달 동안 벌어서 1년을 편안히 놀고 먹는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축성과 재건

최초로 대구읍성이 수축된 것은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의 일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교통상 요지에 읍성을 쌓게 하면서 대구에도 성을 쌓았는데, 당시의 대구부사 윤방에 의해 토성으로 수축되었던 읍성은 대구가 왜군에게 함락되면서 파괴되었다.

그 뒤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고,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閔應洙)는 조정에 대해 대구에 성을 쌓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영조(英祖) 12년(1736년) 4월부터 돌을 이용한 석성의 형태로 다시 축성 공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6월 읍성은 완공되어 11월에 준공식을 열었다. 흙으로 쌓았던 최초의 읍성이 파괴된지 약 140년만의 일이었다.

철거

조선 말기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 고종(高宗) 7년(1870년) 당시 경상감사 김세호로 하여금 대구읍성을 크게 중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흥선대원군은 실각했고,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열강들과 차례차례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처음 대구에 들어와 정착하던 1893년에만 하더라도 그들은 대구에서 자그마한 이나 잡화를 파는 상점이나 하는 정도였지만, 1900년에 대구에 일본인들의 조직인 일본인회가 설립되고, 1903년 부터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어 일본인들은 철도 건설 부지로 예정된 지역의 토지를 사들이면서 대구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부산 - 대구를 잇는 철로가 개통되기 1년 전인 1904년에는 일본인 철도 종업원과 공사 업자, 노동자 및 상인, 여관, 요릿집이 대구에는 일시에 불어나 그 수는 1천여 명에 달했는데, 당시 통감부의 군사, 정치적 보호를 받던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조선의 쌀과 잡곡, 소가죽과 소뼈 등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대신 석유, 실, 소금, 사탕, 술, 밀가루, 일용 잡화 등 일본산 제조업 제품이 대거 수입되었으며, 최초의 은행인제일은행 부산지점의 출장소가 대구에 세워지고, 한국의 화폐 대신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일본 화폐가 점차 유통되기 시작했다. 읍성이 건재한 대구에서 일본인 상인들은 대구 중심부로는 진출하지 못한 채 성밖에서만 모여 있었고, 일본은 자국 상인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 수비대 1개 분대를 대구에 주둔시키고 일본인들의 자치조직으로 일본거류민회를 조직했으며, 1906년 9월에는 통감부의 지방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했다.

철거 과정

대구 중심부로 상권을 넓히려는 일본인 상인들에게 대구읍성은 골칫거리였다. 일본인들은 성밖 아니면 성의 외곽 도로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 상인들과 당시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1905년부터 의도적으로 읍성의 허술한 부분을 여기저기 무너뜨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성벽 때문에 대구가 근대 도시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하루 빨리 읍성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상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조정을 자처한 것은 당시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로 대구에 부임해 있던 박중양이었다. 이미 청일전쟁이 발발하던 무렵부터 일본인들과 교유하며 일본 유학 중에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고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귀국하여 일본군의 고등 통역관을 맡기도 했던 그는 뼛속까지 골수 친일파로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 서서 활동하던 그를 대구의 일본인 거류민들은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革舊改新·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박중양은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

일본인 이와세, 니타에, 사이토, 이토 네 사람과 극비리에 모의해 한국인과 일본인 인부 60여 명을 부산에서 고용해 대구로 불러들인 상태에서 읍성 해체가 시작됐다. 이미 내부(內部)에 "대구부의 성첩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1906년 10월에 보내놓은 그였지만, 정작 성벽을 부수는 작업은 조정의 허가 통지가 내려오기도 전에 시작된 박중양 자신의 독단이었다. 읍성을 한창 헐어내는 와중에 조정에서 성벽 철거를 불허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박중양은 읍성 해체를 강행한다. 오직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성벽 철거는 관리로서 무모할 뿐 아니라 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박중양 자신도 그런 경우를 생각해 자신의 두 아들 문웅(文雄)과 무웅(武雄)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까지 세워놓은 상태에서 성벽 철거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대구역 근처에 매입해둔 도원동 일대 수만평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했고, 읍성이 헐리는 동안 대구도로위원회를 만들어 북문 밖과 동문 밖의 도로를 개통하는 것, 대구역 앞의 도로 폭, 성벽 파괴 작업 청부건을 의결했고, 이를 위해 1907년 3월에는 일본거류민단에서 5천 원을 내어 도로 공사에 착수했다.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 무리에서 선비 한 명이 분을 못 이긴 채 앞으로 나섰지만, 주위의 만류로 물러났다. 박중양은 물러서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력한 조선인이 기껏 덤비는 꼴이라니….’ 그리고 인부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시작하라! 동트기 전 지시한 바를 차질없이 수행하라!” 박중양의 벽력같은 호령과 함께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정부의 지시도 없이 독단으로 성벽을 파괴한 박중양의 비리에 대해 내부에서는 그를 추궁했는데, 박중양은 정부로부터 비위를 규명하기 위한 칙서를 받고 신변이 위태해졌으나 당시의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오히려 평남관찰사로 '영전'되었다가 1908년 6월에 다시 경북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금의환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자신이 벌인 성벽 철거사업의 마무리에 나섰다. 성벽 도로가에 있던 가옥들을 철거하고, 성벽 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신설한다는 그의 작업 계획에 일본 거류민들은 모두 찬사를 보냈다.

대구읍성이 헐리고 난 뒤, 경상감영의 객사였던 달성관도 일본인들에게 무상으로 넘어갔다. 일본인들은 달성관을 헐고 새로운 시가지를 만들고자 했고, 대구 사람들은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일본 거류민단의 객사 파괴를 저지하자"고 쓴 방을 곳곳에 붙이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수백 명의 주민이 철야로 달성관을 지켰다. 당시 기생 염농산 등이 주민들과 합세하여 객사 앞에서 농성하기도 하였다. 강제로 해산하려 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자 일본인들은 대구에 주둔하던 자국군 수비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켜 달성관을 에워싼 대구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기어이 달성관을 부숴버렸다.

1909년, 대구부청 앞에서 포정동,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선과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선으로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십자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도로가 개통되고 박중양은 충남관찰사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석별의 기념으로 뒷면에 성벽 해체와 십자로 개통의 공적을 상징하는 십자형이 새겨진 금줄이 달린 고급 시계를 선물했을 만큼 그를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철거 이후

대구 객사를 일본인들에게 매각하고 공자묘를 헐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공자묘에 부속된 대강당을 교사로 쓰면서 당시 이승만, 서재필의 후원도 받고 있던 사립협성학교를 내쫓아버리기까지 했던 박중양의 행동은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그가 대구 시가지를 확장시켰다는 여론도 나타나면서 박중양을 처벌하자는 목소리는 줄어들었지만, 대구읍성의 철거는 결과적으로 대구의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 상권을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객사를 헐어버림으로서 객사 앞 종로 부근을 중심으로 개설되던 약령시의 상권도 사라지고, 객사 주위의 민가마저 일본인 상인들이 사들여 도로를 만드는 가운데, 약령시는 본래의 터전을 빼앗긴 채 이듬해인 1910년 부터는 남쪽 성벽이 철거된 자리인 남성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구를 지나는 철도와 이와 연계된 국도를 건설함으로써 전국 주요 도시로서의 이동이 쉬워지고 넓은 배후지역에 대한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이 강화된 가운데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1910년 약 2천 가구에 7천여 명이 되었다. 성내에 살던 대구부민들의 거주지역을 일본인들이 잠식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들은 서남쪽 구릉지대로 밀려나게 되었고, 일제의 지배기구와 은행, 우체국, 일본인 상점들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동성로 등 대구 동북부를 중심으로 들어서는 등 전통적인 대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성벽 해체 소식을 재빨리 들은 사람들은 눈먼 땅을 사재기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4] 성 밖에 땅값은 평당 10원이었으나 오히려 성안의 땅 값은 2원이었다는 것이다.

*영남제일관

위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만촌동)

대구읍성은 1590년(선조23년)에 축성된 토성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파괴되어 그 후 140년간 성이 없었다가 영조 12년(1736) 4월 8일에 채석을 시작하고, 4월 25일에 본 성채를 이룩하고 6월 6일까지는 여첩을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 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칭하였다. 그 후 1870년 중수하여 성벽 위에 누각 4개를 세웠지만, 1906년 헐어버렸으며, 1980년 지금의 영남제일관을 중건하였다. 

 

*대구읍성 복원(2019-04-23)

대구 중구청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대구읍성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재점화하고 있다. 오늘날 대구를 있게 한 역사적 기반 중 하나였던 곳인 데다, 4대문과 성벽 등 흔치 않은 구조물이 많아 관광 명소로도 제격이라는 이유다. 대구읍성 복원 필요성과 그 방안에 대해 중구청과 시민단체, 관련 전문가의 구상을 두 차례 짚어 본다.

♧ 일제에 철거된 300여년 역사 대구읍성

한반도의 고대에서 중세 시대 성곽으로 도시를 둘러쌓은 읍성은 외적 침입을 방어함과 동시에 관부(행정)와 병영(군사), 민거(군·현민 거주지) 기능을 아우르는 구조물이다.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년) 왜구 침략에 대비해 토성으로 처음 쌓았다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했다. 성곽 둘레는 2천560m, 폭은 8.7m, 높이는 3.5m 전후로 알려졌다.

오늘날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로 조성된 네 방위 성벽에는 과거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주 관문), 공북문의 4대문이 있었다. 성곽 네 모퉁이에는 동소문·서소문 등 부 출입문과 4방위 망루(동장대·서장대·남장대·북장대)도 존재했다.

성내 북동쪽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행정기관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 객사인 달성관이 있으며, 이 밖에도 화약창, 병영, 남쪽의 주거지 등이 위치했다.

대구읍성은 1907년 일제가 한반도 내 일본인 거주지를 확보하고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전국 읍성을 철거하면서 함께 파괴됐다. 성벽 터에는 신작로가 조성됐고, 성벽을 이루던 팥죽색 안산암 성돌은 신축 건축물 자재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구시·중구청 '사료 확보, 상징 조형물 조성'

대구시와 중구청은 지금껏 사료를 바탕으로 원형 또는 상징물을 복원하거나 사료를 모으는 데 주력해 왔다.

대구시는 1980년 남문인 영남제일관을 대구 수성구 만촌동 금호강변 망우공원 일대에 복원했다. 타 지역 성곽 형태와 과거 발굴된 영남제일관 사진 등 일부 사료를 바탕으로 최대한 원형을 살렸다.

이후 중구청은 지난 2002년 대구 한방테마거리 조성공사 때 성벽 석축(기초석·주춧돌)과 근대 우물, 영남제일관 토층 등을 발굴하면서 대구읍성의 실체를 확인하고 복원 시도에 나섰다.

2012년에는 대구읍성 상징거리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시민 상대 성돌찾기 공모를 벌여 옛 계성고등학교 담장과 아담스관 벽 등 대구 곳곳에서 성돌 300여개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모양의 돌들을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젊음의 광장 일대에 모아 조형물 겸 쉼터로 조성하기도 했다.

북성로와 동성로가 만나는 대구역 맞은편 모퉁이에는 대구읍성 복원 모형도와 안내문을 설치했고, 북성로 일대에서 발견된 성벽 주춧돌도 투명 구조물을 덮어 발굴된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중세·근대 지도를 고쳐 현대 주요 도로를 표시한 한글판 읍성 복원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중구청은 대구 곳곳에 3만여개의 성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13년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자료 가운데 영남제일관과 달서문 사진이 발견되면서 사대문 복원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달서문 사진은 가로 3칸, 측면 2칸 구조의 팔작지붕 형태를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민·관 합심 "북성로 일대라도 복원 검토"

중구청은 지난 2월부터 달성토성·경상감영·대구읍성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연구용역을 벌이고 있다. 이와 함께 북성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벌이며 영남제일관과 공북문 복원 및 이전복원 계획도 구상 중이다. 두 사업 모두 대구읍성 복원 필요성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해 9월 이원호(이상화 시인 가문 종손) 추진위원장을 필두로 지역민이 모여 만든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도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추진위 관계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원형 존재가 필수인 만큼 복원 필요성이 높다.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부라도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곽 터 대부분은 도로(차도·보도)로 바뀌어 이곳에 성곽을 원상 복원하기 힘든 실정이다. 특히 차도로 쓰는 서성로에 성벽이나 달서문을 세웠다가는 도로 폭이 좁아지거나 차량 통행을 가로막는 상황도 우려된다. 이런 이유로 중구청은 성벽 형상 중앙분리대를 세워 원상 복원을 대신했다.

도심 한가운데에 편입된 대구읍성터 일대의 비싼 땅값을 보상해 복원 부지를 마련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약령시의 영남제일관, 동성로의 진동문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나마 공북문 일대가 복원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곳은 주변이 소방도로이거나 2차로에 그치고, 주변 대부분이 공구상점이라 행인과 차량 통행량이 비교적 적다. 주변 상점, 식당과 협의해 부지를 매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매매를 강제할 수 없는 만큼 원상복원이 불가능할 경우엔 상징 재현물이라도 만들고자 방안을 고심 중이라는 게 중구청의 설명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대구읍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지 못하더라도 일부 주요 상징만큼은 반드시 조성해 최대한으로 복원하는 것이 목표다. 가장 실현 가능성이 큰 방안을 찾아 대구의 뜻깊은 상징물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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