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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여행

[충북 보은여행] 일구 테마산악회에서 11월 정기산행은 한국8경 제2의 금강 명당터 국립공원 속리산 법주사 탐방,유래,전설,설화 - 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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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3. 일구 테마산악회에서 11 정기산행은 한국8경 제2의 금강 명당터 국립공원 속리산 법주사 탐방을 탐방하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법주사 일원에 올해 단풍은 지고 없었습니다~~~ 



1.속리산 법주사 동양 최대의 금동미륵대불: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속리산에 있는 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속리산을 보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속리산은 맑고 청량한 산이다.

옛날 이곳을 찾았던 백호의 시에 묘사된 것처럼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구름 속에 갈무리되어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다.

 

2.속리산 법주사 오리숲:

천황봉에서 관음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남쪽 지역에 법주사가 있다. 이곳이 바로속리산 법주사 일원’이라는 명승으로 지정된 구역이다. 법주사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자연에 의해 형성된 아름다운 산수와 법주사를 중심으로 역사 깊은 문화 경관이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경승지다.

 

3.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속세를 벗어난 아름다운 절경으로 속리산은 제2의 금강이라고도 불린다. ‘속리’라는 이름은 신라시대에 갖게 된 명칭이다. 신라가 통일을 한 후 불교가 융성해졌던 784년(선덕왕 5)에 진표스님이 이 산에 이르게 되었다. 산 아래 밭에서 소들이 밭을 갈고 있었는데 스님을 보자 일하던 소들이 모두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렇게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를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곳 사람들이 속세를 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보다 오니로 물든 세상에서 깨끗하고 신성한 산으로 떠난 곳이라는 의미로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속리산은 이름 또한 다양하다. 구봉산 외에도 광명산, 미지산, 형제산, 소금강산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4.속리산 법주사 이정표:

이처럼 순수한 자연으로 이루어진 속리산 안에 명당터가 있는데 그곳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건너간 의신(義信)스님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속리산에 들어와 553년(진흥왕 14)에 창건한 사찰로 ‘법이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절’이라 하여 법주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미륵신앙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은 혜공왕 때 이곳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진표(眞表)와 그의 제자 영심(永深)에 의해 발현된 것이다

 

5.속리산 법주사 안내도: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때 중수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석물도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물을 중수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법주사 경내에는 유명한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등이 있고, 다수의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를 비롯하여 주위에 크고 작은 암자가 위치해 있다.

 

6.속리산 법주사 금강문:

속리산과 법주사에는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이 중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왕위를 찬탈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는 깊은 마음의 병과 몸에 생긴 피부병으로 고생했다. 심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조는 먼저 속리산으로 비접을 떠났다. 법주사 본찰에서 문장대로 가는 도중에 있는 복천암에서 세조는 두 가지 지병을 치료하고자 기도를 했다. 3일간 기도를 하고 신미대사로부터 3일 동안 설법을 들은 후 샘물을 마시고는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몸의 피부병은 낫지 않아 다시 오대산 월정사로 가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7.속리산 법주사 금강문 내부:

또한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비접행차와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세조의 연(가마)이 이 소나무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늘어져 있어 “연 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가 정이품 벼슬을 하사했다는 나무다. 그리고 외속리면 장재리에는 대궐터가 있는데 세조가 보은을 지나 속리산 쪽의 나지막한 고개에 올랐을 때 노승이 나타나 행궁을 지으라고 일러준 곳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세조가 말을 갈아탄 말티 고개를 비롯해 미륵댕이, 북바위, 목욕소, 은구석 등에도 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세조 32권에는 세조가 1464년(세조 10) 오랫동안 비접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8.속리산 법주사 금강문 내부:

설화는 장소의 가치를 더해준다. 속리산과 법주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화민족임을 의미하며, 한반도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9.속리산 법주사 천왕문:

법주사는 신라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0.속리산 법주사 철솥: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12.속리산 법주사 범종각: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13.속리산 법주사 전경:

법주사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를 비롯, 다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만 3점이고, 보물은 12점, 충북 유형문화재가 21점, 문화재자료 1점 등이다.

이외에도 법주사 자체가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도 2점이 있다.

이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법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이다.

 

14.속리산 법주사 쌍사자 석등

 

15.속리산 법주사 사천왕 석등

 

16.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17.속리산 법주사 삼성각

 

18.속리산 법주사 명부전

 

19.속리산 법주사 진영각

 

20.속리산 법주사 석조 희견보살입상

 

21.속리산 법주사 원통보전

 

22.속리산 법주사 석조

 

23.속리산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24.속리산 법주사 당간지주

 

25.속리산 법주사 석련지

 

26.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높이 27m의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

 

27.속리산 법주사 전경

 

28.속리산 법주사 인증샷

 

29.속리산 법주사 전경

 

30.속리산 법주사 문화재 입장료 요금표

 

31.속리산 법주사 오리숲:

 

32.속리산 법주사 오리숲 안내석

 

33.일구 테마산악회 하산주 안주

 

34.일구 테마산악회 하산주

 

35.일구 테마산악회 하산주

 

36.일구 테마산악회 단체사진

 

37.일구 테마산악회 전세버스



*속리산 법주사 일원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속리산에 있는 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속리산을 보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속리산은 맑고 청량한 산이다. 그 옛날 이곳을 찾았던 백호의 시에 묘사된 것처럼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구름 속에 갈무리되어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다.


속리산 세조길 유래: 세조길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요양차 스승인 신미대사가 있는 복천암으로 순행 온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명명되었습니다. 


문장대는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펼쳐진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리산은 동서로 이어지는 높은 능선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는 겹겹이 산줄기가 뻗어 있고 그 사이로 여러 개의 계곡이 깊은 골을 이루어 신령스러운 명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산봉우리와 능선 곳곳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암괴석들은 속리산의 모습을 한층 더 신비롭게 만들고 있다. 특히 문장대에는 큰 바위가 산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데 마치 그 모습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것과 같이 매우 기묘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문장대는 바위 꼭대기에 100 이 함께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황봉(해발 1,058m)을 비롯하여 비로봉, 문장대, 문수봉, 신선대, 관음봉 등 아홉 개의 높은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면서 내륙으로 꺾여 흐르는 중앙부에 위치한 속리산은 금북정맥이 분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문장대를 중심으로 동쪽 천황봉에서 서쪽 관음봉까지 연결되는 산봉우리를 비롯해 능선의 남쪽과 북쪽으로 전개되는 넓은 사면 지역을 품안에 두고 있다.


법주사 일원천황봉에서 관음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남쪽 지역에 법주사가 있다. 이곳이 바로 ‘속리산 법주사 일원’이라는 명승으로 지정된 구역이다. 법주사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자연에 의해 형성된 아름다운 산수와 법주사를 중심으로 역사 깊은 문화 경관이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경승지다.
속리산은 한국팔경에 속하는 명산으로 사계절 내내 철따라 매우 특이하고 뚜렷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봄철에는 산벚꽃을 비롯해 야생화로 온 산이 뒤덮이고, 여름에는 노거수로 형성된 소나무 군락이 창송의 푸르름을 발하며,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이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겨울에는 눈이 덮여 온통 하얀 세계를 만든다. 이렇듯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속리산에는 기암의 절경 문장대를 비롯해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 등 여덟 개의 대가 있으며 은폭동계곡, 용유동계곡, 쌍룡폭포, 오송폭포 등과 같은 아름다운 경승이 많다.
속세를 벗어난 아름다운 절경으로 속리산은 제2의 금강이라고도 불린다. ‘속리’라는 이름은 신라시대에 갖게 된 명칭이다. 신라가 통일을 한 후 불교가 융성해졌던 784년(선덕왕 5)에 진표스님이 이 산에 이르게 되었다. 산 아래 밭에서 소들이 밭을 갈고 있었는데 스님을 보자 일하던 소들이 모두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렇게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를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곳 사람들이 속세를 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보다 오니로 물든 세상에서 깨끗하고 신성한 산으로 떠난 곳이라는 의미로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속리산은 이름 또한 다양하다. 구봉산 외에도 광명산, 미지산, 형제산, 소금강산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순수한 자연으로 이루어진 속리산 안에 명당터가 있는데 그곳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건너간 의신(義信)스님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속리산에 들어와 553년(진흥왕 14)에 창건한 사찰로 ‘법이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절’이라 하여 법주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미륵신앙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은 혜공왕 때 이곳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진표(眞表)와 그의 제자 영심(永深)에 의해 발현된 것이다.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때 중수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석물도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물을 중수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법주사 경내에는 유명한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등이 있고, 다수의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를 비롯하여 주위에 크고 작은 암자가 위치해 있다.

속리산과 법주사에는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이 중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왕위를 찬탈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는 깊은 마음의 병과 몸에 생긴 피부병으로 고생했다. 심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조는 먼저 속리산으로 비접을 떠났다. 법주사 본찰에서 문장대로 가는 도중에 있는 복천암에서 세조는 두 가지 지병을 치료하고자 기도를 했다. 3일간 기도를 하고 신미대사로부터 3일 동안 설법을 들은 후 샘물을 마시고는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몸의 피부병은 낫지 않아 다시 오대산 월정사로 가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비접행차와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세조의 연(가마)이 이 소나무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늘어져 있어 “연 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가 정이품 벼슬을 하사했다는 나무다. 그리고 외속리면 장재리에는 대궐터가 있는데 세조가 보은을 지나 속리산 쪽의 나지막한 고개에 올랐을 때 노승이 나타나 행궁을 지으라고 일러준 곳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세조가 말을 갈아탄 말티 고개를 비롯해 미륵댕이, 북바위, 목욕소, 은구석 등에도 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세조 32권에는 세조가 1464년(세조 10) 오랫동안 비접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설화는 장소의 가치를 더해준다. 속리산과 법주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화민족임을 의미하며, 한반도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속리산 법주사 일원’을 비롯해 ‘가야산 해인사 일원’ 등 사찰과 주변의 자연경승지를 포함하고 있는 유산이 다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과거 ‘사적 및 명승’이었던 유산을 재분류하여 명승으로 지정한 것이다. 사적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적과 함께 명승으로 중복하여 지정하는 것은 사적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의 명승 지정은 법주사와 같은 유명한 사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주변의 경승지를 조화롭게 가꾸어 속리산을 국민이 더욱 즐겨 찾는 장소로 친밀하게 만들고 있다.


*공민왕도 세종임금도 찾아온 명찰

법주사는 신라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문화재

법주사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를 비롯, 다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만 3점이고, 보물은 12점, 충북 유형문화재가 21점, 문화재자료 1점 등이다. 이외에도 법주사 자체가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도 2점이 있다.

이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법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이다.

쌍봉사 대웅전과 두 기였지만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이 불타는 바람에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도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신법 천문도병풍신법(보물 제848호)은 불교와 관련 없는 문화재로 경종 3년(1723년)에 중국에 와 있던 쾨글러(I.Koe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의 큰 별자리표를 관상감 김태서와 안국빈이 직접 배워서 그린 별자리그림이다.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본으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아마도 영조 때 영빈 이씨의 원당을 만들고 이 병풍도 함께 하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자정국존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예다. 충혜왕의 명을 받아 국사의 반열에까지 오른 스님의 비문을 자연암벽에 새겨 놓았다. 대웅보전 뒤에 자리잡은 선희궁 원당은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원당이다. 청와대 옆 칠궁의 하나인 선희궁의 이름 그대로 절집 안에 후궁의 원당이 들어서 있는 특이한 예다.

지금 이 절에 있는 쌍사자석등(보물 제15호)·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및 절 어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은 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 충숙왕 1년(1341)에 세운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비롯한 수십 개의 비와 부도(浮屠)가 있고 높이 27m의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

마지막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석옹이다. 현재 총지선원 왼쪽 40미터 지점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인데 문화재 전문가들도 용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나 법주사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김칫독으로 사용했던 돌 항아리라고 한다. 또한 법주사 일운의 속리산은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팔살전 :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 : 국보 제64호

보은 법주사사천왕 석등 :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 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괘불탱 : 보물 제1259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 보물 제1360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1361호

보은 법주사 철솥 :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 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사천옹문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법주사 석조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속리산 사실기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보은 법주사 석옹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보은 법주사 궁현당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보은 법주사 가견구년명 철종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보은 중사자암 동종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보은 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보은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보은 법주사 어적암 다층청석탑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마타여래삼존좌상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보은 문수암 산신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8호

보은 보은사 지장시왕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불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5호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웃자퀴즈 340 빈이란?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매주 월요일 정답 공개 합니다 ㅋㅋㅋㅋ

 

*유익한 포스팅이 아니었다면 아래모양 공감누르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