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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베스트 경관 20선 중 7선 두사충과 뽕나무골목의 뽕나무사랑 이야기 설화를 전해드립니다.
1. 두사충은 명나라 두충 사람인데 시성 두보의 21대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때 명장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풍수지리 참모였습니다.
2. 천주교 대구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계산성당) B출구 좌,우에 뽕나무 8그루 고목이 있습니다. 6월에 오디가 많이 달립니다.
3. 계산동 이곳은 과거에 뽕나무 골목이었답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벽화 조형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원군으로 왔다가 정유재란이 끝니고 조선에 귀화했습니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밝아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자리에 집터를 잡고 살다가 경상감영이 그곳으로 옮겨오자 계산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4. 두사충이 계산동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이후 이 일대를 뽕나무골목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조선여인과 사랑이야기가 함께 전해져 오고있습니다.
5. 하루 천 냥이 나오는 명당이 있습니다.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해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잡고, 두 아들에게 이 터는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자리 라고 하였답니다.
6. 그의 뛰어난 안목은 400년 영남의 수도 경상감영의 터가 되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서면서 지역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어 그야말로 하루에 천 냥을 버는 명당으로 자리매김 하였답니다. 1601년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두사충은 자신의 집터를 반납하고, 이곳 계산동으로 옮겨와 정착 했답니다.
7. 두사충은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수군 도독 진린 지휘하의 비장복야문하주부의 직책으로 다시 참전 했습니다. 두 번의 조선 출병으로 당시 수군을 총괄하던 충무공 이순신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 라는 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답니다. 두복야는 정유재란 당시 두사충의 직책명을 말합니다.
8.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은 그 자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는 대구 만촌동 소재 두사충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써준 시 봉정두복야를 찬하였답니다.
9. 계산성당 B출구 담장 좌, 우측에 뽕나무 고목 8그루가 그당시 뽕나무골목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측에는 뽕나무 5그루가 있고요. 좌측에도 뽕나무 3그루가 현재도 자라고 있습니다.
10. 그럼 뽕나무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뽕나무의 꽃말은 '지혜, 못이룬 사랑' 입니다. 열매는 6월부터 액질의 핵과가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달려 검은 자주색으로 익는데요. 이 열매를 '오디'라고 합니다.
11. 뽕나무는 양잠, 공업용, 식용, 약용으로 이용됩니다. 열매는 단맛이 있어 먹을 수 있습니다. 잎은 누에의 사료, 나무껍질은 황색 염료, 그리고 목재는 뒤틀림이 적으므로 장롱, 경대, 악기 등의 가구재, 세공재로 쓰인답니다.
12. 열매는 생식하거나 술을 담글 수 있습니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산제 또는 환제로 하여 사용합니다. 복용 중에 도라지, 복령, 지네를 금해야합니다. 약재를 다룰 때 쇠붙이 도구(철)를 쓰지 않습니다.
13. 뽕나무의 효능은 주로 소화기·순환계·신경계·호흡기 질환을 다스리는데요. 강정제, 관절통, 노화방지, 고혈압, 당뇨병, 변비, 비만증 등 150여종에 효능이 있어서 만병통치약으로 쓰입니다.
14. 뽕나무는 잎, 뿌리, 열매, 가지등 모두가 버릴것없이 약재로 쓰입니다. 뽕나무 겨우실이, 상황버섯도 귀중한 약재로 쓰인답니다.
15. 다음은 두사충의 뽕나무사랑 이야기 설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두사충과 뽕나무 사랑 이야기 -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지리전략가인 두사충 장군이 귀화하여 인근 경상감영공원 터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지역 계산동입니다. 두사충은 조선의 열약한 의복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삼을 권장하여 계산동 일대를 두릉 두씨 세거지로 삼았답니다.
16. 그러던 어느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17.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답니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 보았답니다.
18. 그 아낙네는 천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답니다.
19. 그 후 두사충은 최정산(현 대덕산) 기슭으로 옮겨가고 민가가 들어섬에 따라 뽕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뽕나무 골목’이란 이름으로 두사충의 전설은 아직까지 전해옵니다.
20. 두 아들을 데리고 대구에 정착한 중국 귀화인 두사충의 사연이 깃든 뽕나무입니다. 그로 인해 뒷날 계산동엔 ‘뽕나무 골목’이 생겼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뽕나무가 거의 사라지고 그 때의 뽕나무밭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21.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답니다. 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일까요?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됩니다.
22.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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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의 뽕나무 사랑 이야기
뽕나무 골목 설화에 의하면
두사충은 명나라 두충 사람인데 시성 두보의 21대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때 명장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풍수지리 참모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지리전략가인 두사충(杜師忠 또는 杜思忠) 장군이 귀화하여 인근 경상감영공원 터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지역 계산동입니다.
두사충은 조선의 열약한 의복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삼을 권장하여 계산동 일대를 두릉 두씨 세거지로 삼았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답니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 보았답니다.
그 아낙네는 천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답니다.
그 후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 기슭으로 옮겨가고 민가가 들어섬에 따라 뽕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뽕나무 골목’이란 이름으로 두사충의 전설은 아직까지 전해온다.
뽕나무 하면 대구도 빠질 수 없다. 바로 ‘두사충(杜師忠)의 뽕나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을 따라왔다 고향에 가지 않고 두 아들을 데리고 대구에 정착한 중국 귀화인 두사충의 사연이 깃든 뽕나무다. 그는 귀화 후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일대에서 뽕나무 재배와 양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이웃 처녀와의 ‘러브 스토리’도 남겼다. 그리고 그로 인해 뒷날 계산동엔 ‘뽕나무 골목’이 생겼다. 지금 계산성당 옆 식당 담벼락 벽화는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던 뽕나무 중 남은 담장 안 8그루가 이를 증언하는 듯하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뽕나무가 거의 사라지고 그 때의 뽕나무밭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두사충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원군으로 왔다가 정유재란이 끝니고 조선에 귀화했습니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밝아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자리에 집터를 잡고 살다가 경상감영이 그곳으로 옮겨오자 계산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두사충이 계산동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이후 이 일대를 뽕나무골목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조선여인과 사랑이야기가 함께 전해져 옵니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
두사충은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수군 도독 진린 지휘하의 비장복야문하주부의 직책으로 다시 참전 했습니다.
두 번의 조선 출병으로 당시 수군을 총괄하던 충무공 이순신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 라는 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답니다.
두복야는 정유재란 당시 두사충의 직책명을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은 그 자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는 대구 만촌동 소재 두사충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써준 詩(시)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를 찬하였다.
*하루 천 냥이 나오는 명당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해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잡고, 두 아들에게 이 터는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자리 라고 하였답니다.
그의 뛰어난 안목은 400년 영남의 수도 경상감영의 터가 되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서면서 지역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어 그야말로 하루에 천 냥을 버는 명당으로 자리매김 하였답니다.
1601년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두사충은 자신의 집터를 반납하고, 이곳 계산동으로 옮겨와 정착 했답니다.
두사충이 경상감영공원 자리에서 2년 남짓 살고 대구의 중심지 격이었던 자신의 땅을 흔쾌히 경상감영 터로 내어놓았다.아무리 명당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두사충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갸륵히 여겨 당초 면적의 갑절에 해당하는 땅을 대토해 주어 그 가솔을 이끌고 편안히 살도록 하였다.경상감영공원 자리는 그 후 대구의 중심이 되었고 인근 향촌동은 한동안 대구의 중심상업지로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두사충의 말대로 하루에 천량이 나오는 땅이 되었다.
*두사충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 두사충(杜師忠).
두사충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 온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습니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삼을 만한 좋은 터를 잡는 일이 그의 임무로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어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왜 한국의 역사가 되어 한국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역사 속 두사충과 조우하며 모명재길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볼까요!
※명풍수 두사충
때는 1592년 임진년, 한양 봉수대에 연기가 활활 피어올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임진왜란 발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그의 일급 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과 함께 조선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 이여송과 두사충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전투에서 왜군에 대파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패전의 모든 책임이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두사충에게 돌아갔습니다.
“두사충을 참수하라!”
그러나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 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두사충.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 알 수 없는 기분이 두사충을 감싸 안았고 그는 조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두사충 대구에 뿌리내림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면서 두사충은 직감할 수 있었어요. 바람 앞의 등불은 ‘조선’이 아닌 바로 ‘명나라’라는 것을. 명(明)이 기울고 청(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합니다. 그리고 대구 땅에 터를 잡게 되지요. 그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두고 왜 대구에 정착을 했을까요?
조선 조정에서는 귀화한 두사충을 극진히 대우하며 그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출전하여 공을 세운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조선에서 살겠다하니 그럴 만도 했지요.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은 오래 전부터 대구를 마음에 둔 터였어요. 그가 대구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자리입니다. 그자리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오늘날 대구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니 그의 풍수가 신통방통하게 들어맞은 셈이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부지로 결정되자 두사충은 나라를 위해 그 땅을 흔쾌히 내어 놓습니다.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조정은 지금의 계산동 땅을 하사하였으나 이 땅마저도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습니다. 계산동 일대를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경상감영공원, 계산동 뽕나무 골목 이외에도 두사충은 대구 곳곳의 역사와 이야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국명나리를 그리워 하며
두사충이 대구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두사충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습니다. 또한 호를 ‘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모명(慕明)’으로 바꾸었어요.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리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습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이 느껴지는 부분이지요.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답게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은 ‘모명유결(慕明遺訣)’이란 풍수서를 펴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은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땅에 흙이되다.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습니다.
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일까요?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杜陵杜氏)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뽕나무
이명 : 상근피(桑根皮), 포화(蒲花)
학명 : Morus alba
생약명 : 상백피(桑白皮)
동속약초 : 가시뽕·꼬리뽕·들뽕·몽고뽕·산뽕·왕뽕
꽃말 : 지혜, 못이룬 사랑
잎은 어긋나며 길이 10cm 정도인 달걀 모양의 원형 또는 긴 타원 모양의 달걀꼴로서 3~5개로 갈라지는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표면은 거칠거나 평활하며 3~5쌍의 맥이 있고 잎자루와 더불어 뒷면 맥 위에 잔털이 있다. 잎을 자르면 유즙이 나온다.
꽃은 6월에 암수딴그루 또는 암수한그루로 잎겨드랑이에 황록색의 꽃이삭이 달린다. 수꽃이삭은 새 가지 밑 부분의 잎겨드랑이에 꼬리처럼 생긴 미상 꽃차례로 달려 밑으로 처진다. 암꽃이삭은 길이 5~10mm이며 암술대가 거의 없고 암술머리는 2개이다. 씨방에는 털이 없다.
열매는 6월에 액질의 핵과가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달려 검은 자주색으로 익는다. 이 열매를 '오디'라고 한다.
상(桑)·상목(桑木)·오디나무라고도 한다. 야생하는 것은 산뽕이라 하여 높이가 10m 이상 되는 것도 있으나, 재배종은 매년 가지를 치므로 관목 모양이 된다.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종은 이 난에서 설명하는 백뽕나무(白桑 : M.alba)이다. 작은 가지는 회갈색 또는 회백색이며 잔털이 있으나 점차 없어진다. 양잠·공업용·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열매는 단맛이 있어 먹을 수 있다. 잎은 누에의 사료, 나무껍질은 황색 염료, 그리고 목재는 뒤틀림이 적으므로 장롱·경대·악기 등의 가구재·세공재로 쓰인다. 잎을 상엽(桑葉), 뿌리껍질을 상백피라 하며 약재로 쓴다. 특히 동쪽으로 뻗은 뿌리의 껍질이 약효가 좋다. 흙 밖으로 나온 뿌리는 쓰지 않는다. 땅 속에 있는 뿌리를 채취하여 바깥쪽 껍질을 긁어 낸 뒤에 속의 흰 껍질을 벗긴 백피만을 쓴다. 뽕나무겨우살이는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며 귀중한 약재로 취급된다. 열매는 생식하거나 술을 담근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산제 또는 환제로 하여 사용한다. 복용 중에 도라지·복령·지네를 금한다. 약재를 다룰 때 쇠붙이 도구(철)를 쓰지 않는다.
효능은
주로 소화기·순환계·신경계·호흡기 질환을 다스린다.
관련질병: 각기, 감기, 강장보호, 갱년기장애, 거담, 건망증, 경련, 고혈압, 곽란, 관절염, 관절통, 구충(촌충), 기관지염, 기관지천식, 기미·주근깨(주근깨), 기억력감퇴, 냉한, 노망, 노이로제, 뇌일혈, 뇌졸중, 누낭염, 누안, 단독, 당뇨병, 당뇨지갈, 대하증, 독두병, 두통, 마비, 적면, 명목, 목적동통, 몸살, 몽설, 무좀, 발모제, 발열(신열), 백내장, 변비, 보간·청간, 보로, 보양, 보폐·청폐, 보혈, 복수, 복통, 부종, 분자, 불면증, 불임증, 비뉵혈, 비만증, 빈뇨증, 산후복통, 산후증, 산후출혈, 산후풍, 설사, 소갈증, 소변불리, 소변불통, 소복팽만, 소종양, 소화불량, 수족마비, 수족불수, 수종, 숙취, 습진, 시력감퇴, 식체(가물치, 개고기, 복어), 신경통, 신부전, 신장병, 심장마비, 심장병, 아구창, 악창, 안면경련, 안정피로, 안질, 안태, 야뇨증, 양기부족, 어혈, 열성하리, 오로, 오장보익, 오한, 온풍, 외이도염, 요통, 원기부족, 원형탈모증, 월경불순, 유두풍, 유방발육부전, 유방염, 유정증, 윤장, 음부소양증, 음위, 음종(남성외음부부종), 이급후중, 이명, 자양강장, 자한, 적취, 젖몸살, 조루, 주부습진, 중풍, 진정, 창종, 천식, 청열, 최음, 축농증, 타박상, 토혈, 편두통, 폐결핵, 폐렴, 풍, 풍습, 피로곤비, 피부미용(거칠어진 피부-고운 살결을 원할 때, 피부노화방지), 피부윤택, 피부병, 피부소양증, 피부염, 한열왕래, 해수, 해열, 행혈, 현훈증, 환각증, 황달
소아질환: 간질, 감적, 경풍, 백일해, 번열, 변비, 불면증, 소아열병, 소아천식, 피부병, 해열, 헛배 나온 데
• 잎
갱년기장애, 경련, 고혈압, 구갈, 구충(회충), 기관지천식, 기침, 노이로제, 누낭염, 두드러기, 두통, 류머티즘, 마비증세, 명목, 목적동통, 무좀, 발열, 부종, 불면증, 비만증, 수종, 신경통, 아구창, 안오장, 외이도염, 원형탈모증, 유선염, 유정증, 이완출혈, 주부습진, 중풍, 천식, 청열풍, 편두통, 풍습비, 피부병, 피부소양증, 하지부종, 한열
소아질환: 밤에 보챌 때, 소아열병
• 뿌리
각기, 감기, 거칠어진피부, 거풍, 경풍, 경혈, 고혈압, 곽란, 구충(촌충), 기관지염, 단독, 몽정, 발한, 백일해, 복수증, 부종, 빈뇨, 사독, 산후증, 소변불리, 소종, 수종, 신경통, 양모, 여드름, 유정증, 이뇨, 자양강장, 장모발, 중풍, 진정, 진해, 창종, 천식, 축농증, 충독, 토혈·각혈, 폐결핵, 폐렴, 페열, 풍, 풍습, 피부소양증, 해수, 해열, 행혈, 황달
소아질환: 경련, 소아열병
• 열매(오디)
강정제, 관절통, 귀울림(이명), 기억력증진, 노화방지, 단독, 당뇨지갈, 대머리예방, 머리털검게, 무좀, 변비, 보혈, 부종, 불면증, 산후하혈, 설사, 시력저하, 안정, 어혈, 음식체(개고기), 이뇨, 자양강장, 조갈증, 풍, 피부병, 해열, 현기증
소아질환: 불면증, 소아열병
• 가지
관절염, 류머티즘, 수족마비, 풍습, 피부소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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