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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여행

[대구여행] 2017~2018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한국관광 100선 대구 방천시장 &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어느 60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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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2017~2018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한국관광 100선 방천시장 &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이 있습니다.

오늘은 대구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둘레길 한바퀴 순환해 봅니다.

위치: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238 (대봉동).

 

 

1.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김광석 길은 故 김광석이 살았던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조성한 벽화거리이다. 2010년 '방천시장 문정성시 사업'의 하나로 방천시장 골목길에 11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김광석 길은 중구청과 11팀의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2.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입구: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 조형물과 포장마차에서 국수 말아주는 김광석,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김광석 등 골목의 벽마다 김광석의 모습과 그의 노래 가사들이 다양한 모습의 벽화로 그려졌다. 매년 가을에는 방천시장과 동성로 일대에서 '김광석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故 김광석을 추억하고 있다.

 

3.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입구 동상:

방천시장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하,김광석길)은 2009년, 쇠락한 전통시장인 방천시장을 문화와의 접목을 통한 상권 활성화를 위해 대구 중구의 ‘별의별 별시장’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문화체육관광부 2010년 ‘문전성시사업’에 선정되어 방천둑 옹벽 350여 미터에 고(故)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조성하면서, 스토리 벽화, 조형물, 음향시설 등 80여점의 다양한 작품을 설치하여 전통시장과 예술이 함께하는 특별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4.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정오의 희망곡 방송실:

 길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품과 김광석 길 전역에 잔잔하게 흘러 나오는 서정적인 노래는 김광석의 향수를 다시 불러 일으켜 이곳을 도심속 관광명소로 만들었으며 안전행정부 ‘2013년 향토자원 베스트 30‘에 선정되었다. 또한, 김광석을 기리는 김광석 노래부르기 대회, 김광석 탄생 50주년 추모 콘서트, 김광석 18주기 추모 거리음악회등 각종 문화행사와 버스킹 공연 등이 개최되고, 마을기업 ‘청춘아트팩토리’, 사회적기업, 거리에서, 협동조합, 청연 등 문화와 예술이 결합한 새로운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브랜드파워로 핵심 관광명소가 되었다.

 

5.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골목방송 스튜디오:

김광석 (金光石), 1964.1.22. ~ 1996.1.6.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이다.

 

6.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인증서: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찿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7.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김광석 연혁: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1.6. 자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표곡으로는〈사랑했지만>,〈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 <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김광석을 '노래하는 철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노래는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늘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노래를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8.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김광석 음반: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 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1.6.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9.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안내판: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10.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포스터:

1964.1.22. 대구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11.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포토존:

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12월 노래를 찿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찿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12.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포토존:

1989년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1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다.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1991년 부터 꾸준히 학전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였으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13.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1996.1.6.새벽 자택에서 전깃줄로 목 매 자살하였다. 향년 33세. 시신을 화장한 후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서해순, 90년 결혼)과 딸(김서연), 어머니(이달지), 큰누나(김광나), 둘째형(김광복), 작은누나(김광득)이 있는데 큰형(김광동)은 김광석이 군 입대 도중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김수영)는 2004년 별세했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2019.1.23., 1.30. 방송분에서 김광석 20주기를 맞아 다시 김광석 편을 하였다.

 

14.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15.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16.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사랑의 자물쇠

 

17.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거리 음악가

 

18.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19.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김광석 동상

 

20.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공연장

 

21.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포토존

 

22.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포토존

 

23.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24.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25.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벽화

 

26.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골목인파

 

27.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먹거리

 

28.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먹거리

 

29.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먹거리

 

30.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먹거리

 

31.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먹거리

 

32.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골목인파

 

33.김광석 다시그리기길 골목인파

 

34.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약도



*김광석길(김광석다시그리기길).

위치: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238 (대봉동).

김광석 길은 故 김광석이 살았던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조성한 벽화거리이다. 2010년 '방천시장 문정성시 사업'의 하나로 방천시장 골목길에 11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김광석 길은 중구청과 11팀의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350m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 조형물과 포장마차에서 국수 말아주는 김광석,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김광석 등 골목의 벽마다 김광석의 모습과 그의 노래 가사들이 다양한 모습의 벽화로 그려졌다. 매년 가을에는 방천시장과 동성로 일대에서 '김광석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故 김광석을 추억하고 있다.

방천시장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하,김광석길)은 2009년, 쇠락한 전통시장인 방천시장을 문화와의 접목을 통한 상권 활성화를 위해 대구 중구의 ‘별의별 별시장’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문화체육관광부 2010년 ‘문전성시사업’에 선정되어 방천둑 옹벽 350여 미터에 고(故)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조성하면서, 스토리 벽화, 조형물, 음향시설 등 80여점의 다양한 작품을 설치하여 전통시장과 예술이 함께하는 특별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길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품과 김광석 길 전역에 잔잔하게 흘러 나오는 서정적인 노래는 김광석의 향수를 다시 불러 일으켜 이곳을 도심속 관광명소로 만들었으며 안전행정부 ‘2013년 향토자원 베스트 30‘에 선정되었다. 또한, 김광석을 기리는 김광석 노래부르기 대회, 김광석 탄생 50주년 추모 콘서트, 김광석 18주기 추모 거리음악회등 각종 문화행사와 버스킹 공연 등이 개최되고, 마을기업 ‘청춘아트팩토리’, 사회적기업, 거리에서, 협동조합, 청연 등 문화와 예술이 결합한 새로운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브랜드파워로 핵심 관광명소가 되었다.

김광석 (金光石), 1964.1.22. ~ 1996.1.6.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찿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1.6. 자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표곡으로는〈사랑했지만>,〈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 <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김광석을 '노래하는 철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노래는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늘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노래를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 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1.6.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생애

1964.1.22. 대구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12월 노래를 찿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찿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1989년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1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다.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1991년 부터 꾸준히 학전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였으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1996.1.6.새벽 자택에서 전깃줄로 목 매 자살하였다. 향년 33세. 시신을 화장한 후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서해순, 90년 결혼)과 딸(김서연), 어머니(이달지), 큰누나(김광나), 둘째형(김광복), 작은누나(김광득)이 있는데 큰형(김광동)은 김광석이 군 입대 도중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김수영)는 2004년 별세했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2019.1.23., 1.30. 방송분에서 김광석 20주기를 맞아 다시 김광석 편을 하였다.

타살의혹

부인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시했다. 세간에 알려진 김광석의 자살설에 대해 가족들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광석의 누나들은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 역시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라며 아들의 자살을 믿지 못했다.또, 김광석과 음악 동호회 활동을 했던 한 지인은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쯤부터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며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개인적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문점들이 지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밝혀져 김광석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총 3가지 주요 의문점이 있었는데 1.김광석이 목을 스스로 맸냐는것,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3. 정말로 우울증이 있었냐는것이다. 1번 의문의 근거는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했을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을 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또 지인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거다. 근데 전깃줄이 늘어나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고 김광석 자택은 현재 내부 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2번 의문은 고 김광석씨는 메모광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런 유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 첫째 자형은 "(김광석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있다.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3번째 이유가 된 고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가 주장한 우울증 역시 지인 말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음악 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 드릴 수 있다. 김광석 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적어도 1년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회 공연 할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 가는걸 본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부인 서해순의 말의 신뢰도는 떨어지는데, 첫째 사후 얼마 안되어 딸과 미국으로 간 점 둘째 고 김광석씨 가족과 재산 다툼을 한 점, 셋째 고 김광석씨 아버지와 합의한 내용을 어긴 점이다.



*다시뜨는 김광석길 & 방천시장 (2017.2.13.).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근대골목, 신라인의 향기가 묻어 있는 달성토성,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들어온 것을 기념해 열리는 사문진 피아노 콘서트 등 대구가 이야기를 입고 있다.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근대골목과 김광석길 등 지역의 숨은 이야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대구에서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스토리 자원을 발굴해 지역 문화관광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고 있다. 뉴시스는 대구 지자체들이 진행하고 있는 '스토리텔링' 사업을 발굴해 시리즈로 게재한다.

중구, 45억 투입 주차장 등 조성 '관광 업그레이드'

“우수에 찬 김광석의 노래가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면 누구나 잠시 자리에 멈춰 서게 됩니다. 20대 부터 60대 등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공간 이죠”

2017.2.12일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의 한 골목길. 바람마저 쌀쌀하게 부는 영하권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구 도심을 남북으로 통과하는 신천과 국채보상로가 만나는 수성교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길은 휴대폰과 카메라로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 촬영에 한창인 연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또 머리가 하얗게 쉰 한 노년부부와 딸 내외, 손자의 손을 맞잡고 삼대가 느린 걸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찬찬히 둘러보기도 했다.

이곳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수의 이름을 딴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이하 김광석길)이다.

김광석길은 ‘이등병의 편지’, ‘서름 즈음에’, ‘먼지가 되어’ 등의 가요로 유명한 중구 대봉동 출신 가수 고 김광석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방천시장 인근에 조성된 김광석길은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해가 지면 쓰레기 더미가 뒹굴고 인적이 드물어 치안을 걱정해야 할 소외된 길이었다.

김광석길은 방천시장 다시 살리기 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방천시장은 광복 이후 일본, 만주 등에서 돌아온 이주민들이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다.

한때는 싸전과 떡전으로 유명세를 타 점포 수 1000여개가 넘는 대구 대표 재래시장 중 하나였지만 대형마트와 주변 백화점에 밀려 쇠락을 거듭했다.

이런 방천시장과 주변 상권을 살린 것이 바로 ‘김광석 스토리’다. 이곳은 지난 2009년부터 중구청이 주도한 ‘별의별 별시장 프로젝트’와 ‘문전성시 프로젝트’ 등을 거치며 전국구 관광 명소로 변모했다.

  특히 문전성시 프로젝트 2단계로 추진했던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대구 스토리텔링 관광의 거점명소가 됐다.

주중에는 1000~1200명, 주말평균 5000명 이상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간 대구를 찾아도 갈 곳이 없다는 오명도 김광석길이 다시금 바꾸고 있는 것.

 서울에서 왔다는 김진영(23·여·학생)씨는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대구에 놀러왔는데 김광석길을 꼭 둘러보고 싶어 일부러 찾았다”며 “예쁜 벽화가 많아 사진 찍기에 적격인 것 같다”고 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벤치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있던 이재형(30·대구 달서구 송현동·자영업)씨는 “이곳저곳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은데다가 볼거리가 많아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찾고 싶다”고 했다.

 주변상권 역시 김광석길 조성 전후를 기해 크게 활성화됐다.

 오물과 쓰레기가 넘치던 오래된 주택가는 공·폐가를 리모델링한 개인카페, 공방, 식당, 옷가게, 갤러리 등이 틈 없이 들어섰다.

올해 중구청은 김광석길 업그레이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관광객들의 고질적 불편사항인 주차난 해소를 위해 올해 45억원을 투입해 주차대수 82면 규모의 대봉동 공영주차장을 조성한다. 또 벽화 3점도 추가해 또다른 스토리를 입힐 예정이다.

김광석길이 주목받으면서 방천시장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김광석길에서 보고 듣는 기쁨을 느낀 관광객들이 먹는 즐거움을 찾는 연계코스로 찾기 때문이다.

방천시장 내 위치한 한 떡집은 먹음직스런 색색의 떡들이 포장돼 가판대에서 진열돼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가득 묻은 오래된 식당들도 제법 손님로 가득 차 붐볐다.

 저녁의 방천시장은 채소가게, 생선가게 등이 문을 닫은 후 호프집, 정육식당 등이 장사를 열기 때문에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천시장에서 만난 이용수(72·대구 중구)씨는 ”친구들과 부추전에 막걸리 한잔 하려고 단골식당을 찾았다”며 “나처럼 나이가 많이 든 시장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 예전처럼 활기 띄길 바란다”고 전했다.



*예술로 탈바꿈한 대구 방천시장.

최근 대구의 명소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곳이 대구 방천시장이다. 대구시 중구 대봉동 수성교 옆에 위치한 방천시장은 한때 서문시장,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 3대 시장으로 손꼽혔던 시장이다. 1945년 해방 후 일본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피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시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는 싸전과 떡전 등 1,000여개의 점포가 들어섰을 만큼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쇼핑 공간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00여개에 달하던 점포수는 60여 곳으로 줄어들었다.

파리 날리던 방천시장이 다시 북적이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09년이다. 대구시와 중구청이 지역 미술 작가들과 주민이 힘을 모아 점포에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예술프로젝트인 ‘별의별 별시장’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쇠락하던 시장에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벽화가 그려졌고 매일매일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진다.

여기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전통시장을 지역문화공간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시작한 ‘문전성시’ 사업이 더해져 지금은 대구를 찾은 이라면 꼭 들러야 할 명소로 새롭게 태어났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유신지 

첨부파일 유신지-어느60대노부부의 이야기.mp3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김목경 작사,작곡. 

원곡:김목경,리메이크:김광석, 노래:유신지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 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새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감에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같은 블루스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표현하는 우리식 블루스는 또다른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블루스는 ‘혼’을 담아내는 음악이죠.
우리의 ‘한’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블루스 리듬은 우리의 산조나 굿거리 장단과 비슷한 면이 많아요.” - 김 목경

김목경의 활발한 해외 무대 진출은 2003년 참가한
미국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 뮤직 페스티벌’이 계기가 됐다.
세계 3대 음악 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페스티벌은
3일 동안 16만명의 관객이 몰려 50여개팀의 음악을 즐긴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아 무대에 선 김목경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이때 붙은 별명은 ‘영 에릭 클랩튼’이었다.

블루스 음악으로 ‘한류(韓流)’를 만드는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목경(48)..
김목경이 직접 작사.작곡한 ‘부르지마’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서 유석, 김 광석 등 이 부른 '어느60대 노부부이야기'는
김 목경이 영국 유학시절 창가에서 바라본
어느 노부부를 보고 작사 작곡한 것이고 그의 목소리가 원곡이다.
세계 무대를 누비는 그의 스케줄은 내년까지 짜여 있다.
지난 5~6월 일본의 ‘규슈 블루스 페스티벌’,
노르웨이의 ‘브라그도야 블루스 페스티벌’ 등에 참가한 그는
오는 10월 미국 알칸사스에서 열리는
‘킹 비스킷 블루스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았다.
내년 4월 호주 ‘바이론 베이 블루스 페스티벌’을 비롯해
일본, 노르웨이 등의 공연도 예정돼 있다.
국내에서 냉대받고 있는 한국판 블루스가 해외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고 김광석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게 된 사연입니다.

"1989년쯤으로 기억된다.
마포대교 건너는 중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절절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눈가가 촉촉히 젖어왔다.
김목경씨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였다.
"다시 부르기 2집"에 이 노래를 담기로 했다.
녹음에 들어가서, 가사 중간의 "막내아들 대학시험"이라는
대목에 이르기만 하면 이상하게 목이 메어와
녹음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술먹고 노래를 불렀다.
녹음 중에 술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이 노래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음주 녹음이라고나 할까?
음주녹음에 대한 단속은 없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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