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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여행 /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제1코스 경상감영달성길 대구향토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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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토역사관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제1코스 경상감영달성길에 속합니다..

대구향토역사관은 달성공원 내에 있습니다.

위치 : 대구시 중구 달성공원로 35 (우)41924 : 지번 달성동 294-1

영업시간 : 화요일 ~ 일요일 09:00 ~ 18:00

휴무일 : 1월1일, 추석당일, 설당일

관람료 : 무료

주차 : 주변 유료주차장 이용

관람시 주의사항 : 전시실 내 사진촬영 금지, 음식물, 애완동물 반입 및 흡연 금지

전화 : 053-606-6421

 

 

 

1. 대구향토역사관은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는 곳 입니다.
대구 관련 유물을 수집하여 상설전시하고 있으며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 계승하고 시민의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합니다.

 

2. 대구향토역사관은 달성공원 내에 있습니다.

 

3. 대구향토역사관은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달성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구의 역사와 생활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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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곳 전시실 내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대구향토역사관 관리사무실에 양해를 구해서 취재했습니다.

1997년 개관이래 꾸준히 대구 관련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 2천7백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250점을 2개 전시실에 상설전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여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하고 시민의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5. 대구는 6~1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기원 원년 전후 진한 및 변한 24국 중 한 연맹체로서의 읍락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무렵 신라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신문왕 9년에는 신라 도읍을 달구벌로 옮기려고까지 하였답니다.

 

6.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해서 처음으로 돌을 깨어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던 석기문화 시대를 구석기시대라 부릅니다.

현 인류의 모든 문화는 이 석기문화에서 출발하여 발전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보통 3만 년 이전을 전기구석기시대, 그로부터 1만 년 전 까지를 후기구석기시대라 부르고 있습니다.

 

7. 삼국시대 이 시기 대구지역 내에서는 지역 집단간에 불균등한 발전이 격화되어, 강한 지도력과 권위를 갖는 우두머리 집단이 등장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거대한 묘를 축조하였습니다.
이 고분 조성 시기가 삼국시대에 해당하며, 이는 대구가 서라벌 세력에 의해 신라로 통합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비산동·내당동·대명동·불로동 등지에 축조된 고분들은 이 시기 지역 우두머리 집단의 묘입니다. 

8. 통일신라시대때 대구는 지방의 한 현으로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신문왕 9년에는 신라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지방 군사조직인 10정중 하나가 대구의 진산인 비슬산 아래에 주둔하였습니다.

경덕왕 16년에는 달구화에서 대구라 개칭하였습니다.

 

9. 고려시대에 대구는 후삼국기에 들면서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이는 등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개성로 정해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이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대구는 비중이 크게 감소되었습니다.

10. 조선시대에 요충지로 부각된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도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 조선이 건국된 후 점차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3년 인근의 수성현과 해안현이 대구현에 속하게 되어 대구의 인구는 약 1,300여 호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1. 대구읍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선조 23년 달성에서 동으로 2리 떨어진 곳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토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통과하면서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약 140여 년 동안 대구는 읍성이 없는 관아도시로 있게 되었습니다.

 

12. 근대 대구는 경상감영 설치 후 경상도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전국지방제도의 개혁으로 전국이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대구에는 23부의 하나로써 23개 군을 관할하는 대구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이 해에 대구진위대가 설치되어 종로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13.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에 부제를 실시, 이 때 대구는 대구부로 개칭되어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15년에는 윤상태, 서상일 등 대구지역의 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앞산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가 만들어졌고, 같은 해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다.

 

14. 현대에는 일제의 패망과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민족의 염원인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좌우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미군정하의 대구는 식량난과 콜레라의 만연 등 극도로 불안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습니다. 

 

15. 대구향토역사관 영상입니다.

대구향토 역사자료 화면이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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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기는 2층에 있는 대구향토역사관 제2 전시실입니다.

 

17. 줄당기기 입니다.

대구지방에서는 줄다리기를 "줄땡기기 줄당기기" 등으로 부르며, 마을마다 음력 정월 보름과 2월 사이에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에서 큰 줄당기기는 용두방천에서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줄에는 암,수가 있어 동쪽을 숫줄, 서쪽을 암줄이라 하였으며, 이긴 쪽은 그 해의 농사가 잘되고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18. 이공제비 입니다.

이공제비는 대구관판 이서 공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주민들이 세운 송덕비입니다.

1776년 대구 관판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의 침수 피해를 염려해 1778년 주민 부담없이 자신의 사재를 들여 신천 하류이 제방을 새운 후 대구 시가지가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게되었습니다.

 

19. 좌측 기와집은 전통가옥 경주최씨종가및 보본당 사당입니다.

대구 옷골 마을의 경주최씨 종가가옥은 광정공파의 시조인 최단의 후손인 조선시대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주택입니다. 

우측에 초가집은 한덤마을 조길방 가옥입니다.

이건물은 함안 조씨가 11대째 살아오고 있는 초가로 된 일반 민가로써, 조선 중기에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지은것으로 전합니다.

한덤마을은 해발 800여m나 되는 경사가 급한 깊은 산골 마을입니다.

  

20. 날뫼북춤 입니다.

날뫼북춤은 대구의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민속춤으로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이 맞추어 추는 춤입니다.

비산 농악 등과 그 뿌리를 같이 하지만, 특히 북만을 가지고 추는 북춤으로 발전한 점이 특이합니다. 

 

21. 천황메기입니다.

천황메기는 오랜 옜날부터 대구시 서구 비산동 일대의 주민들이 가뭄과 돌림병을 막기 위하여 신앙으로 받들어온 "기천왕,중천왕, 말천왕"에 대한 정초에 해오던 지신풀이 농악입니다.

   

22. 이 그림은 대구달성도 입니다.

 채색필사본, 정황, 18세기 후반, 영남대박물관 소장품입니다.

 

23. 백년 전 대구지도입니다.

대구읍성이 회손되기 전 상황을 알 수 있는 지도로, 1906년임을 알 수있는 스탬프가 찍혀 있습니다.

 

24. 대국ㄴ대역사관에더 바라 본 달성공원 모습입니다.

 

※네이버지도에 달성공원 대구향토역사관 표시해주세요.

 

 

*유튜브 동영상 링크 바로가기 : 화면 좌측 하단 다음에서보기 눌러주세요!

https://youtu.be/dzUL3bcPPEI

 

 

 

*대구향토역사관(Daegu local history museum)

위치 : 대구 중구 달성공원로 35 (우)41924 : 지번 달성동 294-1

영업시간 : 화요일 ~ 일요일 09:00 ~ 18:00

휴무일 : 1월1일, 추석당일, 설당일

관람료 : 무료

주차 : 주변 유료주차장 이용

관람시 주의사항 : 전시실 내 사진촬영 금지, 음식물, 애완동물 반입 및 흡연 금지

전화 : 053-606-6421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는 곳 입니다.
대구 관련 유물을 수집하여 상설전시하고 있으며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 계승하고 시민의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대구향토역사관은 우리나라 토성(土城)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달성토성(현 달성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구의 역사와 생활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1997년 개관이래 꾸준히 대구 관련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 2천7백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250점을 2개 전시실에 상설전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여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하고 시민의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대구의역사및 연표

6~1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기원 원년 전후 진한 및 변한 24국 중 한 연맹체로서의 읍락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무렵 신라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문왕 9년(689)에는 신라 도읍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고까지 하였다.

고려시대의 대구는 신라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으나, 12세기부터 점차 위상이 상승하기 시작하였고, 무신정권기에는 대구 부근에서 발생한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고 침입 때에는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제5차 몽고 침입 때에는 공산성에서 대구지역 주민들이 대몽항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 생산지로, 또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 후 세조 12년(1466)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이후 영남지역의 행정·교통·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던 시기 일제의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자 1907년 국내 최초로 대구에서는 절미·금연·금주를 통하여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1915년 영남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대구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 중 하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동포와 월남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보게 되었고, 1950년 6.25전쟁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 대구에서 일어난 2·28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대구는 성장을 계속하여 영남지역의 중심도시로 발전, 1995년 광역시가 되면서 7개 구와 1개 군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2002월드컵을 치르고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해서

처음으로 돌을 깨어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던 석기문화(石器文化) 시대를 구석기시대라 부른다. 현 인류의 모든 문화는 이 석기문화에서 출발하여 발전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보통 3만 년 이전을 전기구석기시대, 그로부터 1만 년 전 까지를 후기구석기시대라 부르고 있다.

후기구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뗀석기와 골각기 등을 사용해서 식물채취와 짐승사냥을 생업으로 하면서, 가족 단위로 무리를 지어 자연의 은신처를 찾아 떠도는 생활을 하였다. 대구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달서구 월성동에서 좀돌날석기가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미 1만 년 이전에 대구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 준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는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부터 빙하기(氷河期)가 끝나고 서서히 온난한 기후로 변하던 때이다. 인류는 이전과 달리 간석기를 제작하고 토기와 직물을 발명하여 사용하였다. 사냥과 채집 외에 식물재배, 가축사육을 주 생업으로 하게 되고 움집(竪穴住居)를 만들어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이 때가 되면 덧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었는데 특히 빗살무늬 토기는 전국에 보급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수성구 상동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빗살무늬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 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구 대봉동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움집터가 발굴되었고, 북구 서변동에서도 빗살무늬 토기와 집석유구(集石遺構) 및 움집터가 발굴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유적을 보면 이 시기의 사람들은 대개 하천변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았다.

 

*청동기시대

-중국의 상, 주나라에서

먼저 발달하였던 청동기문화는 주변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중국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청동기시대로 진입한다.

주거생활에서는 마을을 형성하고, 신분과 재산의 차이를 갖는 사회로 변하며, 이전에 사용하던 빗살무늬 토기는 제작이 쉽고 많이 만들 수 있는 민무늬 토기로 바뀐다. 청동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는 못하였으나, 간화살촉·간돌칼 등 청동제 무기를 모방해 기능을 높인 석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매장형식에서는 고인돌(支石墓)을 조성하게 된다.

 

-대구에서서도 청동기를 모방한

화살촉, 칼과 민무늬 토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대구지역을 흐르는 금호강·신천·매호천·남천·팔거천·진천 등의 유역에 수십에서 수백 기 까지 조성되어 전근대까지도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고인돌 유적의 분포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대구가 한반도 남쪽의 큰 중심지의 하나를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원삼국/초기철기시대

-동아시아에서 철기문화가

출현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4세기경 중국에서는 철제무기가 보급되고 기원전 3세기경이 되면 농기구를 비롯한 일반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하게 된다. 한반도에도 이 무렵 철기가 전해져 빠르게 보급되어 이전의 청동기는 의기화(儀器化)되거나 장식용으로 쓰이게 되고, 철기는 실용의 도구나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사회는 철기 사용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하고, 유력한 지배자가 출현하여 국가 발생의 전단계로 발전한다. 매장(埋葬)유적도 고인돌이 사라지고 널무덤(木棺墓)이 나타난다.이러한 사회변화로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에는 지금의 달성(達城:현 달성공원) 주변에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리웠던 읍락국(邑落國)이 형성된다.

 

-청동기가 의기화 되는 

기원전 1세기 유적은 비산동·평리동·신천동·만촌동·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데,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된 칼과 꺾창·거울을 일괄유물로 한 매장유구(埋藏遺構)가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경의 유적은 복현동·팔달동·대명동·불로동·봉무동·두산동 등지에 분포하는데, 무덤 양식에 있어 기존의 널무덤과 더불어 덧널무덤(木槨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이 나타난다. 또 달성토성·검단토성·봉무토성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삼국시대

정립하게 된다. 이 시기 대구지역 내에서는 지역 집단간에 불균등한 발전이 격화되어, 강한 지도력과 권위를 갖는 우두머리 집단(首長層)이 등장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거대한 묘(古墳)를 축조한다.

이 고분 조성 시기가 삼국시대에 해당하며, 이는 대구가 서라벌 세력에 의해 신라로 통합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산동·내당동·대명동·불로동 등지에 축조된 고분들은 이 시기 지역 우두머리 집단의 묘이다. 고분 속에 넣었던 부장품들은 고분의 규모와 더불어 이 집단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 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달성고분 37호에는 다수의 토기를 비롯하여 경주의 금관과 같은 출자형 금동관(出字形 金銅冠)·금제 귀걸이·목걸이 등 장신구와 더불어 둥근 고리모양 손잡이장식이 달린 큰칼(環頭大刀) 등 많은 철제무기가 부장되어 있었다. 이 고분은 6세기 이후 대구가 신라의 한 지방으로 되기 이전에 축조된 우두머리 집단의 무덤으로서 당시의 권위와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달서유적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다. 규모는 동서 약 380m, 남북 약 470m로 전체 길이는 1,300m이다. 성벽의 규모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하부 폭은 최대 20m에 이르며, 높이는 4~7m로 전체 모습은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경주 월성과 형태가 유사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생김새와 보존상태가 양호해서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록으로는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 벼슬의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내용이『삼국사기』에 전하지만, 달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지역의 중심을 이루던 집단이 그들의 생활근거지를 이용하여 쌓은 토축성(土築城)으로, 여러 차례의 증·수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 성은 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관아지(官衙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감영지(監營地)로 이용된 적이 있었다.

달성이 지금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05년이고, 그 후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과 식민지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1914년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이 곳에 세워 졌으나, 1966년 8월에 신사건물을 해체하고 공원 내부를 정비한 후 오늘날과 같은 동물원 겸 공원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대구는 지방의 한 현(縣)으로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신문왕 9년(689)에는 신라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신라의 지방 군사조직인 10정(停)중 하나가 대구의 진산인 비슬산 아래(現 현풍)에 주둔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달구화(達句火)에서 대구(大丘)라 개칭하였다. 신라 말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대가 왕위쟁탈전 과정에 이 곳에서 전투를 벌였고, 후삼국기 왕건과 견훤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대구 공산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준다.

신라에는 다섯 명산(五岳)이 있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이들 오악은 국가의 동·서·남·북과 중앙을 대표하는 산으로 지금의 토함산·지리산·계룡산·태백산 그리고 중앙인 중악(中岳) 팔공산을 말한다. 팔공산은 신라의 큰 신앙대상지답게 동화사·송림사·부인사·은해사 등 불교유적이 많다. 지금도 동화사 입구의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을 비롯한 산 전역에 보물급 문화유산이 다수 전한다.

 

-고려시대

대구는 후삼국기에 들면서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이는 등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송도(松都:개성)로 정해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이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대구는 비중이 크게 감소되었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壽城郡)·대구현(大丘縣)·해안현(解顔縣)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대구현은 수성군에 속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 : 현 경산)에 속하였다.이후 현종 9년(1018)에는 수성군과 해안현은 경주인 동경(東京)에 속하게 되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 현 성주)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처럼 고려 전기에 있어서는 속현으로 위상이 축소되었다가, 인종 21년(1143) 현령관(縣令官)이 파견되어 주현(主縣)으로 승격한다. 이는 중앙에서 대구지역을 중요한 농업생산지로 인식한데 따른 것이다.

 

-조선시대

요충지로 부각된 대구(大丘)는 농업의 중심지로도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 조선이 건국된 후 점차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3년(1394) 인근의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解顔縣)이 대구현에 속하게 되어 대구의 인구는 약 1,300여 호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구의 발전은 농업을 비롯한 산업의 발달과 교통의 편리, 그에 따른 시장의 발달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대구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종 1년(1419)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고, 세종30년(1448)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민간 구휼기관인 사창(社倉)이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기도 하였다.

세조 12년(1466)에 대구는 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는 대구가 의병활동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고,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영남지역의 교통·군사 중심지이자 행정 중심지로도 발전하게 됨에 따라 명실상부한 영남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안현·하양현(河陽縣)·경산현(慶山縣)·수성현·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縣)을 거느린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구읍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선조 23년(1590) 달성(達城)에서 동으로 2리(약 800m) 떨어진 곳에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그러나 이 토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통과하면서 파괴되었다. 이후 약 140여 년 동안 대구는 읍성이 없는 관아도시로 있게 되었다. 영조 12년(1736) 관찰사 민응수(閔應洙)가 영조의 윤허를 얻어, 그해 1월부터 6월까지 대구 주변 군현민들을 동원해서 달성으로부터 4리(약 1,600m) 떨어진 곳에 이전보다 넓게 석축으로 재건하였다.

축조 당시 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2,124步(약 2.68㎞)이고 높이는 서남쪽이 18尺(3.78m), 동북쪽이 17尺(3.57m)이었으며, 성의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과 동서에 2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1870년 김세호(金世鎬) 관찰사 때 대원군의 명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져 성벽이 개축·확장되었고, 4개의 누각과 8개의 포루(砲樓)를 증설하였다.

 

-근대 대구

대구는 선조34년(1601)

경상감영 설치 후 경상도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전국지방제도의 개혁으로 전국이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대구에는 23부의 하나로써 23개 군을 관할하는 대구부(대구관찰부)가 설치되었다.

또한 이 해에 대구진위대가 설치되어 종로(현 만경관 MMC 부근)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는 지방제도가 시행되어 대구는 다시 대구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상북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06년 당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9월에 그 산하기관인 대구이사청이 설치되는 등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대구지역에서는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로부터 자주성을 지키려는 교육·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통해 직접 일제를 몰아내려는 의병전쟁 등 활발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에는 대구광문회와 대구광학회가 결성되었고, 대구광문회에 의해 대구민의소가 설립되었다.

특히 1907년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이 대구민의소를 기반으로 하여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천삼백만원의 차관을 담배를 끊는 운동으로 국민스스로가 상환하고,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되어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고종황제로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 속에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이간과 탄압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에 부제(府制)를 실시, 이 때 대구는 대구부(大邱府)로 개칭되어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대구에서는 다양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1915년에는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 등 대구지역의 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앞산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재건 달성친목회)가 만들어졌고, 같은 해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3월 8일 서문시장에서의 만세시위 운동을 시작으로 수차례 만세운동이 이루어져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영남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독립청원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저변을 확산시키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해 의열단원 장진홍(張鎭弘)에 의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딧불회 사건 및 태극단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각 학교 학생들의 항일저항 운동이 계속되고 비밀결사가 활발히 이루어져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44년에는 일본군 제 24부대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이 집단적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대구는 근대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탄압 속에서도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한 지속적인 항일 투쟁이 전개된 고장이었다.

 

-현대

일제의 패망과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민족의 염원인 해방을 맞았다.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좌우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미군정하의 대구는 식량난과 콜레라의 만연 등 극도로 불안하였다. 1946년 10월 1일에는 식량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 발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소요사태가 경북지역, 다시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 전쟁기에 대구는 수많은 피난민의 피난처가 되었고 낙동강방어전선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자, 대구지역의 학생들은 2월28일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2·28민주학생의거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와 더불어 자유당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기에는 대구의 섬유산업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1년 대구는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고산면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가 되었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본선경기를 치르고 2003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면서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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