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기자/달서구 블로그 기자

[대구 달서구 서원탐방] 병자호란 공신 백마장군 허득량과 허복량을 모시고 있는 재실 용강서원 탐방 - 신박사.

SMALL

- 와룡산 용강서원 -

♣위치: 대구광역시 달서구 선원로 33길 101 / (지번)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1343-1

평소에는 서원 훼손 방지를 위하여 내부 출입은 통제하오니

오전9시~오후5시 까지 아래번호에 출입승은을 받으세요! 

☎ 053-581-0144


서원(書院)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만 있는 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실은 도심 빌딩 숲에 가려 있는 서원도 많습니다.

대구시내에는 20여곳 서원이 있습니다.

와룡산 권역에는 용강서원, 병암서원, 용호서원, 3개의 서원이 있습니다.

이 세 곳 중에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김해 허씨 현감공파의 용강서원을 탐방합니다.



용강서원

용강서원은 허득량(許得良)등 3분을 모시고 있는 서원입니다.

허득량은 병과(兵科)에 급제하여 문무(文武)에 두루 능한 장수입니다.

그는 인조 때 난을 일으킨 이괄을 쳐부수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촌동생 복량(復良)과 함께 적진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선생이 백마를 타고 달려들어 큰 칼 휘두르며 순식간에 적들을 무참히 쓰러뜨리자

적의 군사들은 허득량을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쩔쩔맸습니다.

그 용맹한 허득량은 인조 15년 남한산성 전투에서 쓰러졌습니다.

싸움터에 나간 허득량을 자나 깨나 기다리던 고향 집에 생전에  

선생을 모시고 다니던 백마가 안장 위에다 선생의 혈서와 전중일기를 싣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용강서원 안내판

용강서원(龍岡書院)은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을 모신 재실로

1639년 용강서원으로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1920년 중창하여 용강사(龍岡祠)라 부르고 1986년에 복원하여 위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 양위(兩位)를 배향하고,

9대조인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시충목(諡忠穆) 허유전(許有全)을 정위(正位)에 추배하였습니다.


용강서원 이정표석

이곡역 6번출구에서 1.3Km 지점에용강서원이 있습니다.


김해허씨세거장비

이곡동 분수공원 내 성서도서관 앞 녹지에 있는 김해허씨세거장비 입니다.

김해허씨세거장비에 의하면 본관지가 김해인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 종7품)을 지내고

임란 때 의려(義旅,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병사)한

12세 묵재(黙齋) 허승립(許承立)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현재 선원, 망정, 장동, 갈산에 거주하는 허 씨들의 입향조로 시기적으로는

임란 후 즉 17세기 전반이나 중반이 아닌가 합니다. 일설에는 임란 중 선산에서 전공을 세운 뒤

그곳에 은거했다가 1622년(광해군 14) 가족을 거느리고 현 구미시 도개를 지나

본향 김해로 내려가던 중 이곳의 풍물에 반하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지지문

용강서원 정문 전면 후면 측면 모습입니다.


동문

동문에는 김해허씨 성서장학회와 김해허씨 현감공파종회 2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용강서원

병자호란 공신 상무헌 허득량과 낙암 허복량,

고려 문신 충목공, 허유전을 기리는 용강서원 강당 입니다.

용강서원은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과,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 두 분을 기리기 위해

1804년(순조 4)년 세워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할 때 두 분의 9대조 충목공(忠穆公) 혀유전(許有全)이 추가로

제향(祭享)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강당인 숭현당(崇賢堂)은 중앙 2칸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동쪽의 수덕헌(修德軒)은 1칸, 서쪽의 사의실(思義室)은 2칸 규모입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이며,

1고주5량 구조로 전면에 툇칸을 구성하였습니다.




강서원 뜰안

큰향나무 2그루가 있습니다.


용강서원서원탑

거북이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위에 용으로 상탑을 만들었습니다.

 

석류나무

강서원 뜰안에는 큰석류나무 2그루가 있는데,

류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용강재

서원이 있기전에 상무헌 허득량과 낙암 허복량 두 공신을 기렸던 용강재 전면 후면 모습입니다.

재실로 사용되는 용강재(龍岡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시설하였습니다.

간단한 3량 구조로 되어 있으면서도 전면에 툇칸을 구성하였습니다.



의문

상의문은 충열사 앞 정문이며 전면 측면 모습입니다.




충렬사

허득량과 허복량 두 공신과 충목공의 위패를 모시는 충렬사 전면 측면 모습입니다.

사당인 충열사(忠烈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차머이고 3량형식의 가구구조입니다.

공포는 익공형식으로 매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설치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로 마감하였습니다.

매년 3월10일 제향을 하고 있습니다.

 


유적비

충목공 허유전 선생의 유적비 입니다.



용강서원 전경

용강서원 전면과 뒷산에서 내려본 전경입니다.


우물

용강서원내에 있었던 옛 우물 입니다.

옛날에는 이우물 물을 맛있게 사용 하였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식수로 먹을 수 가 없습니다.


연못

용강서원내에 있었던 옛 연못 입니다.

옛날에는 이연못에 연꽃과 수생식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지금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당시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던 대구 사람들의 궐기는 거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구는 이런 충의가 넘치는 사람들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 서원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용강서원을 탐방 하면서 아쉬운 점은 서원 서편 담장이 무너져 있는데,

유적 훼손 방지를 위하여 시급한 보수가 요망 됩니다.   

- 이상으로 병암서원 탐방을 마칩니다 -



*병자호란 공신을 제향(祭享) 한 용강서원(龍湖書院)

와룡산 권역에는 3개의 서원이 있다. 성주인 양직당 도성유(1571~1649)와 공의 종제인 서재 도여유(1574~1640), 서재의 아들 지암 도신수(1598~1650)를 기리는 달성군 다사읍 서재마을의 용호서원(龍湖書院)이 그 한 곳이요, 다음은 역시 도문(都門)의 취애 도응유(1574~1639), 낙음 도경유(1596~1637)를 기리는 달서구 용산동 서촌마을의 병암서원(屛巖書院)이고 세 번째로는 김해인 상무헌 허득량(1597~1637)과 공의 종제 낙암, 허복량(1602~1637)과, 충목공 허유전(1243~1323)을 기리는 달서구 이곡동 선원마을의 용강서원(龍岡書院) 입니다.

이 세 곳 중에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김해 허씨 현감공파의 용강서원 입니다.

‘김해허씨세거장비(金海許氏世居庄碑, 성서도서관 앞)’에 의하면 본관지가 김해인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 종7품)을 지내고 임란 때 의려(義旅,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병사)한 12세 묵재(黙齋) 허승립(許承立)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현재 선원, 망정, 장동, 갈산에 거주하는 허 씨들의 입향조로 시기적으로는 임란 후 즉 17세기 전반이나 중반이 아닌가 합니다. 일설에는 임란 중 선산에서 전공을 세운 뒤 그곳에 은거했다가 1622년(광해군 14) 가족을 거느리고 현 구미시 도개를 지나 본향 김해로 내려가던 중 이곳의 풍물에 반하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용강서원은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과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을 모신 재실(齊室)입니다.

1804년(순조 4)년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할 때 두 분의 9대조 충목공(忠穆公) 혀유전(許有全)이 추가로 제향(祭享)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1920년에 중창(重創)하여 용강사(龍岡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80평의 대지에 3간 15평 규모의 재실은 동남향 팔작지붕의 목조와가로 지어졌고 대문간도 있습니다. 뜰 안에는 큰 향나무가 두 그루 서 있으며, 울타리는 막돌 담장있습다. 김해(金海) 허씨(許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일 제향(祭享)하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사우인 충렬사(忠烈祠)를 비롯하여 강당인 숭현당(崇賢堂)이 전학후묘의 형식에 따라 배치되어 있고 재실인 용강재(龍岡齋)가 강당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내에 충목공비(忠穆公碑), 원정비(院庭碑),세거장비(世居庄碑)등이 있습니다.

1)사우

사당인 충열사(忠烈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차머이고 3량형식의 가구구조입니다. 공포는 익공형식으로 매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설치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로 마감하였습니다.

2)강당

강당인 숭현당(崇賢堂)은 중앙 2칸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동쪽의 수덕헌(修德軒)은 1칸, 서쪽의 사의실(思義室)은 2칸 규모입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이며, 1고주5량 구조로 전면에 툇칸을 구성하였습니다.

3)재실

재실로 사용되는 용강재(龍岡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시설하였습니다. 간단한 3량 구조로 되어 있으면서도 전면에 툇칸을 구성하였습니다.

제향 된 세 분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다.

상무헌 허득량은 1597(선조 30)~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상무헌(尙武軒)입니다. 처음 대구 성서에 터를 잡은 승립(承岦)의 손자입니다.

김상용·김상헌형제에게 수학하고,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과 임경업장군에게 무예를 배웠습니다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도사·훈련원부정이 되었습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별장으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3등에 등록되고 부호군에 올랐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에 들어가 광주 쌍령(雙嶺)에서 수많은 적군과 싸우다가 종제 복량(復良)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용강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1842년(헌종 8) 8대손 석화(錫華)가 공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상무헌유고〉가 전합니다.

낙암 허복량의 아버지는 운로(雲老)입니다. 김상용·김상헌의 문인이었습니다. 관이 부총관에 이르렀습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득량(得良)과 함께 광주 쌍령(雙嶺)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陣)에 나아가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용강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충목공 허유전은 1243(고종 30)~ 1323(충숙왕 10). 고려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충주사록(忠州司錄) 연(延)입니다. 원종 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왕의 측근으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순마소에 갇혔다가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습니다.

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안렴사를 지냈으며, 1304년(충렬왕 30)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되었습니다. 1307년(충렬왕 33)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으며,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도첨의참리·지밀직사사가 되었습니다.

1314년(충숙왕 1) 가락군의 봉호를 받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후에 수첨의찬성사로 치사(致仕)했다가 다시 정승으로 복직했습니다. 충선왕이 토번(土藩, 티베트)으로 귀양 가자 왕의 환국을 청원하기 위해 81세에 민지(閔漬)와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왕(瀋王) 고(暠)와 그 일당들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시호는 충목(忠穆)입니다.

이웃 병암서원에 제향 된 낙음 도경유 선생도 광주 쌍령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던 대구 사람들의 궐기는 거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구는 이런 충의가 넘치는 사람들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 서원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웃자퀴즈 391 : 스님들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병은? 정답:탈모증.

*힌트: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매주 월요일 정답 공개 합니다 ㅋㅋㅋㅋ

 

*가실때 아래모양에 공감 버튼을 ~ 눌러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