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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여행 /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 광문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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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서야동 대성사 주차장에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발상지 광문사 터를 소개합니다.

 

 

1. 광문사 터

위치는 대구시 종구 북성로 19-1.  지번은  서야동 1-1 입니다.

 

2.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에 위치한 대성사는 은해사의 대구포교당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3. 대성사 해탈문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에 광문사 터가 있습니다.

 

4. 우측에는 대구 수창초등학교 후문이 있고, 촤측 대성사 주치장에 광문사터가 있습니다.

 

5. 대성사 주차장 바닥 화강석에 국채보상운동 이라는 원형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6. 우측 수창초등학교 담장에 광문사 터와 관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7. 1882년에 만든 태극기 모형입니다.

 

8.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대구광문사 안내문입니다.

대구의 광문사는 사장 김광재, 부사장 서상돈 등이 참여하여 1906년 1월, 한때 황국협회의 기관지였던 시사총보를 접수하여 시대에 맞도록 개화자강 노선에 따라 개편한 출판사였습니다.

 

9. 국채보상운동의 발의는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에서 대구광문사 문회의 회명을 대동광문회 로 개칭하기위한 특별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를 마친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격 제의함으로써 이루어 졌습니다.

서상돈의 발의에 참여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그 자리에서 곧 담배를 끊기로 하고, 의연금으로 2천여 원이 각출되었습니다.

     

10.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는 1866년 7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평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정삼품통정대부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906년 1월 대구광문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마산에서 서거했습니다.

 

11.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은 1850년 10월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대구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대구 제일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정삼품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 경상도 세정 총괄을 했습니다.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여 국채보상도총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2.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표지석입니다.

1907년 1월 29일 광문회 회원들은 일본에 진 나라 빚 일천삼백만원을 갚기 위해 담배릉 끊기로 결의했습니다.

2년여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 물결이었습니다.

 

13. 대구 수창 초등학교 담장에 엽전 모양의 황동판에 국채보상운동 발원지 광문사 터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14. 당시 대구민의소 설치와 군민대회 내용입니다.

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부근에 국채 지원금수합사무고를 설치했습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정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습니다.

 

15. 이 날 노소신사와 청흥부녀들과 술파는 아낙과,  차파는노파,  않은뱅이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백 수십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열기에 찬 대구군민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경상북도 정무부는 무허가 집회이니 산회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16. 여성도 국채보상운동의 횟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도 남자 못지않은 열과 성의로 적극 참여한 것입니다.

남자들의 모금방법이 단연 단주인데 비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절미 감찬 패물 등 가까운데서부터 실천하였습니다.

 

17. 여성들의 운동 역시 대구, 서울, 부산 등 경향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제일 먼저 일으킨 여성들은 앞서 본 국채보상기성회가 발기된 그 이튿날인 2월 23일 대구남일동패물페지 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 부녀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아부인동 포 라는 격문은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여 삼종지도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서 남녀가 다를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18. 이 취지는 국내 전 여성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받아 서울에서는 2월 28일에 부인감찬회를 비롯하여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 부산 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 각지에서 취지를 같이하는 28개 여성단체와 17개 준여성단체가 속출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기생 앵무의 1백원의연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몇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따라하겠소 라고 하여 남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19. 당시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와 기록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0.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전경입니다.

 

※네이버지도에 중구 서야동 대성사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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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NmVKsIVIUg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대구광문사 터

대구의 광문사는 사장 김광재, 부사장 서상돈 등이 참여하여 1906년 1월, 한때 황국협회의 기관지였던 시사총보를 접수하여 시대에 맞도록 개화자강 노선에 따라 개편한 출판사였습니다.

 이후 면목을 일신하여 장지연 등의 지도하에 외국의 신문학을 도입하고, 다산 정약용등 실학자의 저서를 번역, 편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시키고, 나아가서 국권 수호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출판사였습니다.

이 대구광문사 안에 대구광문회가 조직되어 신교육구국운동의 추진단체가 되었습니다.

신교육운동은 대구에 중학교과정의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경상북도 내 41개 군에 사립소학교를 세운다는 원대한 계획이었고, 회원만도 각 군 유지 4~5백명이나 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의는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에서 대구광문사 문회의 회명을 대동광문회 로 개칭하기위한 특별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를 마친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격 제의함으로써 이루어 졌습니다.

서상돈의 발의에 참여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그 자리에서 곧 담배를 끊기로 하고, 의연금으로 2천여 원이 각출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1907년 1월 29일 광문회 회원들은 일본에 진 나라 빚 일천삼백만원을 갚기 위해 담배릉 끊기로 결의했습니다.

2년여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 물결이었습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1866년 7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평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정삼품통정대부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906년 1월 대구광문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마산에서 서거했습니다.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

 1850년 10월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대구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대구 제일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정삼품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 경상도 세정 총괄을 했습니다.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여 국채보상도총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대구민의소 설치와 군민대회

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부근에 국채 지원금수합사무고를 설치했습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정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이 날 노소신사와 청흥부녀들과 술파는 아낙과,  차파는노파,  않은뱅이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백 수십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열기에 찬 대구군민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경상북도 정무부는 무허가 집회이니 산회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횟불을 높이 들고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도 남자 못지않은 열과 성의로 적극 참여한 것입니다.

남자들의 모금방법이 단연 단주인데 비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절미 감찬 패물 등 가까운데서부터 실천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운동 역시 대구, 서울, 부산 등 경향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제일 먼저 일으킨 여성들은 앞서 본 국채보상기성회가 발기된 그 이튿날인 2월 23일 대구남일동패물페지 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 부녀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아부인동 포 라는 격문은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여 삼종지도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서 남녀가 다를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 취지는 국내 전 여성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받아 서울에서는 2월 28일에 부인감찬회를 비롯하여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 부산 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 각지에서 취지를 같이하는 28개 여성단체와 17개 준여성단체가 속출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기생 앵무의 1백원의연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몇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따라하겠소 라고 하여 남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대성사(대구)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 19-1 (서야동)

한국의 사찰들은 역사적으로 부침이 많은 국내외적 영향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역사와 가람이 멸실되는 사례가 빈번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사찰의 불가항력적인 사정으로 인해 허무하게도 무너져버린 경우도 간혹 존재하고 있다. 몇 년전 만 해도 소박하지만 가람이 존재했던 대구 대성사가 바로 후자의 경우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성사의 현재는 그 터에 4층 건물을 지어 올려 은해사의 대구포교당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성사’라는 예전의 사명은 그대로 물려받아 부처님의 법음을 대구지역에 전파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대구 중구지역에서 그 터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손꼽혔던 대성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던 건물인지라 실은 왜색이 짙었던 것이 멸실의 이유로 추측된다. 그러나 새롭게 포교의 장을 연 대성사는 현재 시민선방을 비롯해 참신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주민들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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