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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기자/중구 블로그 기자

대구여행 / 순종황제가 은사모을 치하한 수창학교와 인연 등 대구역에서 달성공원까지 2.1Km 구간 순종황제 어가길(남순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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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어가길은 대구역에서 달성공원까지 2.1Km 구간이며 순종황제 남순행로 대구구간 곳곳에는 황제의 열차를 막으려고 시도한 수창초등학교 학생들, 계몽운동 발상지인 우현서루 옛터, 국채보상운동 발원지 광문사, 거리벽화, 조형가벽 등 그 시대 속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논란도 많지만 순종황제 남순행로 조성사업은 2012년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추진하였으며, 순종황제 상징조형물 조성을 포함하여 도로포장, 가로등개체,간펀정비 등 지역민의 삶의 공간이 개선되었습니다.

 

 

1. 순종황제 어가길 남순행로 대구구간 상징 조형물이 설치된 북성로 구간입니다.

 

2. 1909년 1월7일 오후 3시에 순종황제가 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순종황제 어가길은 대구역에서 달성공원까지 2.1km 구간입니다.

 

3. 순종황제 어가길(북성로) 상징조형물

1909년 1월 순종황제께서 이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대구읍성의 흔적을 상징하는 육면체 덩어리들 위로 세워진 기둥과 그 위에 솟아오른 황제의 길 은 이제 더 이상 굴욕의 역사 가 아닙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교훈삼아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창조하는 미래지향적 의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밝고 역동적인 형상의 조형물에는 북성로의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이 함께담겨 있습니다.

 

4. 북성로 길에 순종황제 어가길 초입(북성로65-2)으로 줌톤에서 설치한 스토리 조형가벽이 있습니다.

 

5. 순종황제가 대구역에서 하차할 때 환영 모습과 대구역의 봉영문을 지나는 모습입니다.

 

6.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입니다.

 

 대한제국 덕수궁 석조전입니다.

 

7. 순종황제 즉위 이후 정치 상황입니다.

 

8. 대한제국 기념장

대한제국의 각종 기념일을 기해 기념장을 발행하였는데 최초는 1901년 9월 1일 고종황제의 탄신 50주년을 맞아 발행한 기념장이며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 기념장, 황태자의 가례 기념장,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 순종황제 남서지역 순행 기념장 등이 있습니다.

 

9. 우현서루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는 곳 이란 뜻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4년 이상화 시인의 조부인 이동진선생이 창설하고 그의 큰아들 이일우 선생이 운영한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이상화선생의 백부 이일우선생이 1904년 급변하는 정세를 보고 인재양성을 위해 세운 학숙입니다.

 

이를 토대로 강의원, 교남학교(現.대륜중고등학교)등이 세워졌으며, 일제 탄압으로 10여년 만에 폐쇄되었으나 구국정신과 학풍이 면면히 이어짐으로써 향토교육의 요람지가 되었습니다.

 

10. 소남 이일우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해 부친 금남 이동진 선생의 뜻을 이어 이 곳에 설립된 우현서루라는 의숙을 운영하셨습니다.

태극기의 의미는 태극문양 음과양의 조화, 흰색바탕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 건괘 하늘, 곤괘 땅, 감괘 달, 리괘 해를 의미합니다.

   

11. 수창초등학 담장에는 순종황제 남순행로 역사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12. 순종황제가 대구역에서 시작해 북성로, 수창동,달성토성으로 이어지는 수창학교 북쪽 길은 대한제국순종황지의 어가(임금이타는 가마)가 지나간 길입니다.

순종황제는 1909년 1월 7일~8일, 12~13일 총2박4일의 일정으로 대구를 방문 했으며, 12일 11시 45분에서 12시10분 사이에 달성토성에서 준비된 달성군 사립학교연합회 운동회를 관람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습니다.

 

학생체조어람을 마치고 다시 행재소로 입어할 때는 달성토성을 나와 시장북로, 달서문, 서문로, 만경관 앞을 지나 관찰도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13. 지방의 소요는 오히려 안정되지 못하고,백성들의 고달프고 피곤함은 수그러들지 않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쳐 마음이 상하는것 같다.

하물며 이에 심한 한파가 닥쳐 민생의 궁핍함이 더욱 심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는것 같으니 어찌 일각인들 참아 궁궐에서 안주하겠는가?

남방순시조칙

 

14. 위의 내용은 남순행당시 1월 7일 남대문에서 대구까지 궁정열차 출발, 도착 시간표가 적힌 엽서입니다.

아래 내용은 남순행당시 1월 13일 대구에서 남대문까지 궁정열차 출발, 도착 시간표가 적힌 엽서입니다.

 

15. 서순행 당시 궁정열차의 순종을 알현하는 신하들 사진입니다.

 

16. 순종이 탔던 궁정영차 옥차 내부 전경입니다.

 

17. 부산 광복로 순행시 행렬 사진입니다.

 

18. 1909년 1월 8일 대구에서 부신까지 궁정열차 발착시각을안내하는 엽서입니다.

 

19. 인도에 설치된 순종황제 남순행로 황동판입니다.

 

20. 남순 대구일정표입니다.

 

3만영이 운집한 대구역 환영인파 사진입니다.

 

21. 수창학교와 순종황제의 인연

경상도지역의 유생들은 경부선 철로에서 상소호곡(上訴號哭)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지역유지들의 자녀가 다녔던 수창학교 학생들은 당시 교동 향교에 있던 학교북편 경부선 철로에 몸을 던져 궁정열차를 막자고 모의했으나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통감부 문서에서는 종로 바닥에 누워 이를 저지하려 꾀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토 통감의 귀에까지 전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을 빌미로 박중양은 수창학교가 할당된 일본국기를 게시하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폐교조치까지 내리려 했습니다. 남순행이 끝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순종은 수창 아이들의 용기를 치하하였고 당시 대한제국 관리들이 쓰던 제모를 교모로 은사하여 수창학교는 은사모를 교모로 가진 자랑스런 학교가 된 것이다.

 

22. 짐은 우신과 무실 네글자로 너희들에게 면전에서 깨우치게 하노라

 

23. 순종황제를 구한 수창의 아이들

1909년 수창학교 학생들에게 남방순행 차 대구에 오시는 순종황제께서 망극하게도 일본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당시 중구 교동  향교에 있었던 수창학교 아이들은 바로 학교 북편의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로에 몸을 던져 궁정열차를 막고 순종황제를 일본군으로부터 구출하고자 결의하였으나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 되었습니다.

통감부 문서에 대구의 학생들이 종로 바닥에 누워 순종황제 순시를 저지하려 꾀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학생들이 수창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순종황제는 의기로운 수창아이들의 용기를 치하하시며 은사금과 함께 당시 대한제국 관리들이  쓰던 제모를 교모로 은사 하시어 수창학교는 은사모를 교모로 가진 자랑스런 학교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즈음까지 학생들은 검은색의 교모를 착용했으며 여름에는 하얀 면을 씌워 사용하다가 교복자유화 시기에 자연스럽게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24. 삼성상회 터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 1938년 3월 1일, 호암 이병철 회장은 28세 되던 해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25. 중구 북성로 인교동 공구골목 상징조형물 입니다.

 

26. 황제지보

1897년 제작된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로 황제국임을 천명한 대한제국 선포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황제 지보는 훈기와 친임관칙지 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재질은 옥 실제크기는 보신 가로 약 9.6cm 입니다.

  

27.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이씨의 자두꽃 문양입니다.

 

28. 순종황제 남순행로 조성사업은 2012년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추진하였으며, 순종황제 상징조형물 조성을 포함하여 도로포장, 가로등개체,간펀정비 등 지역민의 삶의 공간이 개선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낙후된 골목 뒤안길에 숨겨진 침탈의 역사와 구국항일 스토리를 찾아내고 드러냄으로써 반성과 역사 재인식 등 미래지향적인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29.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한일 병합조약  1년전 순종황제는 1909년 대구를 방문하게 됩니다.

황제의 순행은 지방의 사청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기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순종황제를 내세워 반일감정을 무마하고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에 세워진 순종황제의 조각상은 당시를 재현함이 아닌 황제즉위식의 근엄한 모습으로, 암울했던 시대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순종황제어가길 상징조형물

상징조형물은 남순행 당시 순종의 복장은 제국군복이었으나,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마음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근엄한 대례복을 입을 모습으로 설정 하였고, 또한 앞쪽 표제석과 다리의 끊김에서 역사적인 흐름의 위기감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일제치하를 극복한 우리 백성들의 정신을 담은 다리는 표제석 너머로 연장되는 왕의 시선방향과 일치시켰으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순종의 모습은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우리 백성들의 희망을 향한 염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순종의 업적을 기리기보다 순종의 대구달성토성 앞 행차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재인식하고, 치욕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하는 상징조형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부여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하며 구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30.순종황제 어가길 남순행로 대구 마지막 구간 달성공원입니다.

 

황제는 일본 신사를 참배하기위해 이곳에 와서 일본향나무 가이즈까향나무를 기념식수 했습니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자리에 신사에 썼던 돌기둥 잔재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59. 일제의 신사 잔재물

 

※네이버지도에 순종어가길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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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IB4jqkfRvw

 

 

* 순종황제 남순행로

1909년 순종황제는 대구를 방문하게 됩니다.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巡幸)한 것을 남순행,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 등지를 순행한 것을 서북순행(西北巡幸)이라 합니다. 이를 통칭하여 남서순행(南西巡幸)이라고 합니다.

 

남순행(南巡幸)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순종황제를 내세워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였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남서순행을 마친 이듬해 1910년 한일병합의 공포조칙에 서명날인을 강요받았지만, 남서순행에서 만난 백성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을 보았던 순종은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내 한일병합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남순 조칙에서도 드러나듯, 민심을 다스리되 결국 일본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대한제국 황제의 순행은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순종황제남순행로 조성사업』은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낙후된 골목길에 숨겨진 침탈의 역사에 대한 구국·항일정신을 반성과 교훈으로 삼아 역사를 재인식하고 미래지향적인 역사교육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된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 사업입니다.

2.1Km의 순종황제남순행로 곳곳에는 황제의 열차를 막으려고 시도한 수창초등학교 학생들, 계몽운동 발상지인 우현서루 옛터, 국채보상운동 발원지 광문사, 거리벽화, 조형가벽 등 그 시대 속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순종황제 남순행로 조성사업

순종황제 남순행로 조성사업은 2012년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추진하였으며, 순종황제 상징조형물 조성을 포함하여 도로포장, 가로등개체,간펀정비 등 지역민의 삶의 공간이 개선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낙후된 골목 뒤안길에 숨겨진 침탈의 역사와 구국항일 스토리를 찾아내고 드러냄으로써 반성과 역사 재인식 등 미래지향적인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순종황제 어가길(북성로) 상징조형물

1909년 1월 순종황제께서 이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대구읍성의 흔적을 상징하는 육면체 덩어리들 위로 세워진 기둥과 그 위에 솟아오른 황제의 길 은 이제 더 이상 굴욕의 역사 가 아닙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교훈삼아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창조하는 미래지향적 의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밝고 역동적인 형상의 조형물에는 북성로의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미 함께담겨 있습니다.

 

 

*우현서루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는 곳 이란 뜻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4년 이상화 시인의 조부인 이동진선생이 창설하고 그의 큰아들 이일우 선생이 운영한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이상화선생의 백부 이일우선생이 1904년 급변하는 정세를 보고 인재양성을 위해 세운 학숙입니다.

이를 토대로 강의원, 교남학교(現.대륜중고등학교)등이 세워졌으며, 일제 탄압으로 10여년 만에 폐쇄되었으나 구국정신과 학풍이 면면히 이어짐으로써 향토교육의 요람지가 되었습니다.

 

 

*소남 이일우

소남 이일우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해 부친 금남 이동잔 선생의 뜻을 이어 이 곳에 설립된 우현서루라는 의숙을 운영하셨습니다.

태극기의 의미는 태극문양 음과양의 조화, 흰색바탕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 건괘 하늘, 곤괘 땅, 감괘 달, 리괘 해를 의미합니다.

 

 

*수창학교와 순종황제의 인연

경상도지역의 유생들은 경부선 철로에서 상소호곡(上訴號哭)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지역유지들의 자녀가 다녔던 수창학교 학생들은 당시 교동 향교에 있던 학교북편 경부선 철로에 몸을 던져 궁정열차를 막자고 모의했으나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통감부 문서에서는 종로 바닥에 누워 이를 저지하려 꾀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토 통감의 귀에까지 전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을 빌미로 박중양은 수창학교가 할당된 일본국기를 게시하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폐교조치까지 내리려 했다.

남순행이 끝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순종은 수창 아이들의 용기를 치하하였고 당시 대한제국 관리들이 쓰던 제모를 교모로 은사하여 수창학교는 은사모를 교모로 가진 자랑스런 학교가 된 것이다.

 

 

*순종황제를 구한 수창의 아이들

1909년 수창학교 학생들에게 남방순행 차 대구에 오시는 순종황제께서 망극하게도 일본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당시 중구 교동   향교에 있었던 수창학교 아이들은  바로 학교 북편의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로에 몸을 던져 궁정열차를 막고 순종황제를 일본군으로부터 구출하고자 결의하였으나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 되었습니다.

통감부 문서에 대구의 학생들이 종로 바닥에 누워 순종황제 순시를 저지하려 꾀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학생들이 수창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순종황제는 의기로운 수창아이들의 용기를 치하하시며 은사금과 함께 당시 대한제국 관리들이  쓰던 제모를 교모로 은사 하시어 수창학교는 은사모를 교모로 가진 자랑스런 학교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즈음까지 학생들은 검은색의 교모를 착용했으며 여름에는 하얀 면을 씌워 사용하다가 교복자유화 시기에 자연스럽게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창초등학교는 대구교육의 중심 

개교후 수창학교에는 대부분 대구지역 지식인들의 가재들이 다녔으며 특히 독립운동가 이여성,화가 이인성과 이쾌대 등 많은 아이들이 일인들의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하여, 집과 가까운 본정학교를 마다하고 먼길을 걸어 수창학교에 다니며 민족정신을 키워갔습니다.

수창학교 인근지역을 일제는 팔운정 이라 불렀으나 수창학교의 위상과 교세가 대단하였으므로 대구 부민들은 수창학교 인근지역을 수창동 이라 불렀는데, 해방 후 동명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수창학교의 교세와 위상을 인정 수창동 으로공식 동명을 정했습니다. 

 

 

*황제지보.

1897년 제작된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로 황제국임을 천명한 대한제국 선포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황제 지보는 훈기와 친임관칙지 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재질은 옥 실제크기는 보신 가로 약 9.6cm 입니다.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한일 병합조약  1년전 순종황제는 1909년 대구를 방문하게 됩니다.

황제의 순행은 지방의 사청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기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순종황제를 내세워 반일감정을 무마하고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에 세워진 순종황제의 조각상은 당시를 재현함이 아닌 황제즉위식의 근엄한 모습으로, 암울했던 시대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순종황제어가길 상징조형물

상징조형물은 남순행 당시 순종의 복장은 제국군복이었으나,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마음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근엄한 대례복을 입을 모습으로 설정 하였고, 또한 앞쪽 표제석과 다리의 끊김에서 역사적인 흐름의 위기감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일제치하를 극복한 우리 백성들의 정신을 담은 다리는 표제석 너머로 연장되는 왕의 시선방향과 일치시켰으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순종의 모습은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우리 백성들의 희망을 향한 염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순종의 업적을 기리기보다 순종의 대구달성토성 앞 행차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재인식하고, 치욕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하는 상징조형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부여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하며 구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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